[무대]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임창정 등 실력파 캐스팅 눈길

우체국 공무원으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한 남자에게 별안간 벽을 뚫고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어떤 벽이든 뚫을 수 있는 남자! 고지식한 상사에게 소심한 복수 따위를 하며 즐거워하던 남자는 갈수록 대담해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빵과 보석을 훔치는 의적노릇을 하면서 급기야 프랑스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1940년대 파리 몽마르뜨 언덕을 배경으로 한 환상적 이야기 <벽을 뚫는 남자>가 뮤지컬로 다시 만들어져 지난해 11월부터 한국 관객을 만나고 있다.

 

▲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의 포스터. ⓒ 쇼노트

‘이야기의 거장’으로 불리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에메(1902~1967)의 동명 소설 ‘르 빠쎄 무하이으(Le passe-muraille)’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작곡가 미셸 르그랑의 주옥같은 노래 49곡이 이어지는 '송스루(song-through)' 뮤지컬이다. 모든 대사가 노래로 처리되는 형식이다. 1996년 파리에서 초연된 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몰리에르상’ 중 최우수뮤지컬상과 연출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6년 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된 뒤 2007년 공연에 이어 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진 것이다.

이종혁 고창석 임형준 등 스타 캐스팅에 연기도 수준급 

<오페라의 유령>, <지킬앤하이드>, <아이다> 등 화려하고 웅장한 대형 뮤지컬 틈에서 <벽을 뚫는 남자>는 중극장의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규모가 작은 대신 배우 캐스팅만큼은 어느 공연보다 화려하다. 주인공인 듀티율 역에 배우 임창정과 이종혁이 더블 캐스팅 됐고, 비중 있는 조연인 의사 듀블 역에는 고창석과 임형준이 나란히 캐스팅됐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배우들과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입소문이 관객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배우가 같은 역에 더블 캐스팅됐지만 저마다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 쇼노트 제공 <MBC> 화면 갈무리

배우들은 이 작품을 위해 6주 이상 땀 흘리며 맹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가창력과 가사 전달력에서 흠 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임창정과 고창석은 실감 나는 연기와 노래로 강렬한 흡인력을 발휘했다. 조연들도 12명이 23가지 역할을 소화하며 작품을 탄탄하게 받쳐주었다.

가수와 배우로서 모두 성공해 ‘만능 엔터테이너’로 불리는 임창정은 특유의 담담하지만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이미 뮤지컬 <라디오스타>, <빨래> 등에서 내공을 보여준 임창정은 자유분방한 듀티율의 모습을 멋지게 표현했다. 그는 언론시사회에서 “이종혁이 멋있는 듀티율이라면 난 까불거리고 천방지축인 듀티율을 보여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문화방송(MBC)의 <무한도전> 특집 ‘못친소(못생긴 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출연한 후 인기급상승한 고창석은 이 작품에서 ‘흥행 카드’로 꼽힌다. 같은 역을 번갈아 하고 있는 임형준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고창석 형님이 무대에만 나오면 아무 것도 안 했는데도 관객들이 빵 터진다”며 질투 섞인 푸념을 하기도 했다. 충무로의 ‘씬스틸러(scene stealer)’, 즉 눈길 끄는 조연으로 유명한 그는 알코올 중독자인 의사 듀블과 부패한 경찰, 그리고 늙은 변호사 등  1인 3역을 맡아 우스꽝스러운 분장과 재치 있는 대사,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공연 홍보 위해 예능 프로그램에서 ‘얼굴 팔기’ 감수

경쟁이 치열한 공연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요즘 뮤지컬의 스타 출연자들은 방송 예능프로그램에 앞 다퉈 출연한다. <벽을 뚫는 남자> 출연진도 한국방송(KBS)의 <해피투게더3>, MBC의 <라디오스타> 등에 나와 공연과 사생활을 버무린 수다를 풀어놓았다. 이 뮤지컬의 흥행은 이런 활동 덕도 본 셈이지만 관객들은 방송홍보를 떠나 작품이 그 자체로서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 <벽을 뚫는 남자> 홍보를 위해 네 배우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 위 <KBS2>, 아래 <MBC> 화면 갈무리

“난 그저 보통 남자, 성실한 공무원. 소박한 하루하루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장미에 물을 주고 우표 수집을 하고, 대단할 것 없다 해도 인생을 사랑했지.”

주인공 듀티율은 이 대사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았지만 ‘벽을 뚫는 능력’을 갖게 되면서 180도 달라진 삶을 경험하게 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신출귀몰하면서 몽마르뜨 마을을 뒤집어 놓고 신문 1면까지 장식한 듀티율은 이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위험한 도박에 나선다.  듀티율이 사랑하는 이사벨은 검사인 남편의 폭력과 집착 때문에 집안에 갇혀 사는 처지. 듀티율은 이사벨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대담하게 물건을 훔치다 감옥에 갇히지만, 창살을 뚫고 나와 이사벨과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주정뱅이 의사 듀블이 경고한대로 여인의 사랑을 얻는 순간 듀티율은 초능력을 읽고 벽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작품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유쾌하고 소박하지만 2차 대전 후 프랑스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도 담고 있다. 나치에게 부역했던 검사는 자신의 행적을 세탁한 뒤 고위직에 오른 반면 의사 듀블은 나치 군인을 치료해주었다는 이유로 사회적 비난을 받고 술주정뱅이로 전락하는 모습 등이 대비된다.

벽을 허물어야 소통할 수 있다는 주제의식 긴 여운

<벽을 뚫는 남자>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벽’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벽은 개인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지만 사람들 사이를 단절시키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함을 일깨우면서 벽을 허물 수 있는 ‘소통’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듀티율에게 ‘벽을 뚫는 능력’이란 몽마르뜨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랑하는 이사벨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였고 듀블이 술주정처럼 떠든 ’사랑‘이라는 처방은 세상의 모든 벽을 허무는 특효약이었던 셈이다. 

 

▲ 이사벨과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듀티율은 벽에 갇히지만 둘은 영원히 함께 하게 된다. ⓒ 쇼노트

 
이 작품에서 또 눈여겨 볼 부분은 음악과 조명이다. 라이브 밴드 4명이 무대 양 옆에 두 명씩 자리 잡고 피아노, 플룻, 리코더, 색소폰, 실로폰,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여러 악기로 내는 풍성한 음악은 뮤지컬의 생동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조명을 활용하는 방식도 훌륭했다. 듀티율이 벽을 통과하는 장면에서  조명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극 전체의 내레이터인 몽마르뜨의 화가가 파스텔 색채로 그림을 그리는 장면과 늙은 변호사가 느릿하게 걷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또한 조명으로 잘 표현해 따뜻하고도 재치 있는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공연을 보는 동안 관객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단단한 마음의 벽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돌아보게 된다. 혹은 마음의 벽을 뚫고 싶은 어떤 사람을 떠올리기도. <벽을 뚫는 남자>는 서울 창전동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오는 2월 6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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