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의 클래식 톡톡]

오는 9월 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에서 협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 그가 피천득 선생의 외손자라는 사실은 중간 이름 ‘피’(Pi)로 남아있다. 그의 어머니가 바로 피 선생이 석별의 애틋함을 수필에 담았던 막내딸 ‘서영’이다. ‘서영’은 미국에 유학 갔다가 같은 물리학 교수인 재키브와 결혼해 스테판을 낳았다.

 

▲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 ⓒ소니뮤직

소소한 일상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스쳐가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조차 소홀히 하지 않았던 피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그의 외손자가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것도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인연’ 또는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의 수필 제목이기도 했던 ‘인연’은 사람뿐 아니라 사물에도 이어지는 걸까? 피 선생은 ‘부잣집 도련님’이었다가 열 살 때 고아가 되자 친척들이 재산을 모조리 나눠 가진 뒤 바이올린 하나만 건네주었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그 자신이 음악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음은 그의 수필에도 드러난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연주자는 연주시간 내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지휘자나 협연자 또는 독주자보다는 무대 한 켠에서 가끔 제 몫을 하는 이들이었다. 콘트라베이스와 바순, 팀파니 연주자의 소리 없는 기다림과 돌연한 끼어듦을 그 역시 기대감 속에 기다렸다. 

CD나 음반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연주를 직접 듣는 재미 중 하나는 덜 중요해 보이는 연주자들의 기다림과 환희의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유지되는 데도 하찮아 보이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VIP 못지않은 역할을 한다. 오케스트라는 잘 조직된 사회의 축소판이다. 개인이 적재적소에 배치돼 제 역할을 해줄 때 사회가 조화롭게 굴러가듯이 교향악의 화음을 위해서는 악기도 적재적소에 배치돼야 한다. 

 

▲오늘 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오케스트라 악기배치

오케스트라의 악기 배치에는 나름대로 음향 미학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우선 현악기가 가장 앞줄에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소리가 작고 표현이 드라마틱하지 못한 까닭이다. 다른 악기들과 잘 어우러지고 오케스트라의 기본 음향을 형성하기 때문에 악단 전면에 나와있다. 현악기는 관악기에 견주어 표현이 섬세해서 음악의 흐름인 선율을 담당한다. 1바이올린, 2바이올린 구분은 음역에 따른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더 쉽게 이해된다. 처음에는 제1, 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구성된 현악4중주에 콘트라베이스가 추가되면서 오케스트라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소규모라 지휘자가 따로 없고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동시에 지휘를 담당했는데, 오늘날 제1바이올린 수석주자가 악장을 맡는 것과 연관된다.
 
그러다 악기들이 추가로 편성되고, 현악기의 화성을 채워주는 정도였던 관악기가 고전주의 시대부터 끼어들기 시작하더니,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자 독자적 그룹으로 영역을 확보한다. 낭만주의 시대 음악은 곡의 규모가 매우 커지고 표현도 풍부해져 큰 악단과 많은 악기들이 필요했다. 극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관악기와 타악기가 필수적이었다. 팀파니가 홀로 타악기 파트를 지키다가 캐스터네츠와 트라이앵글, 큰북과 작은북이 가세한 것도 낭만주의 시대다. 그들 악기는 외곽 서클을 형성한다.

제때 울려주는 팀파니와 심벌즈 소리, 또렷이 들리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음악의 깊이를 더해주는 콘트라베이스 소리는 음악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키 큰 콘트라베이스는 꽃밭으로 말하면 한 켠에 우두커니 서서 입체감을 더해주는 해바라기 같은 구실을 한다. 이들 악기가 연주를 잠깐 멈추고 있다 해서 음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조용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이 서린 연주장에서, 수석연주자와 팀파니스트는 같은 마음으로 각자의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놓치는 긴박한 울림의 현장에서 단 한번 북을 치는 주자라도 집중해야 함은 물론이다.

음악 연주는 공간을 채우는 일이고, 그 밀도로 연주자의 기량이 드러난다. 생각보다 정교해야 하고 음악에 맞는 적절한 호흡이 필수적이다. 거기에 모든 연주자, 나아가 관객까지 참여해야 숨결이 느껴지는, 살아있는 음악이 완성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필하모니(Phil-harmony)의 ‘Phil’은 라틴어로 ‘좋아한다’는 뜻이다. 명 연주는 ‘하모니를 좋아하는’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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