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 없는 ‘경제민주화’로는 양극화 더 심해져
정책부재의 ‘메시아 정치’ 진보언론이 허상 벗겨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역사는 반복된다’는 금언은 쓰라린 역사를 가진 이들에게는 저주나 다름없다. 나라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금융자본의 손아귀에 떨어지기 1년 전인 1996년의 우리 모습이 지금과 흡사했다. 당시 한국 경제의 위기요인은 순환출자에 의한 재벌의 선단경영과 과잉중복투자에 있었다. 그런데도 재계는 노동자의 임금을 위기의 주범으로 몰아 김영삼 정부로부터 ‘임금총액 동결 선언’과 함께 경기부양책을 이끌어냈다.

언론의 태도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의 ‘한국 경제 사막화’ 담론은 <한겨레>도 12일 보도했듯이 과거 ‘경제위기론’의 수많은 버전 중 하나일 따름이다. <한겨레> 재직 때 경험한 바로는 96년에도 대부분 언론이 선정적으로 위기론을 증폭하며 정부 경제팀에 경기부양책을 촉구했다. <한겨레>는 ‘경제팀은 조바심 갖지 말라’(96년 6월29일 사설)며 단기부양책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냈으나 대세를 돌리지는 못했다. 그나마 안정적 성장을 추구하던 나웅배 부총리팀은 결국 한승수 팀으로 경질되고 ‘경기종합대책’이 발표됐다. 재벌개혁은 손도 못 대 외환위기를 자초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이엠에프 처방’을 충실히 따르면서 절호의 재벌개혁 기회를 놓쳤고, 노무현 대통령은 삼성과 손잡고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까지 했다. 재벌을 섬겼던 이명박 대통령 집권기에 서민들의 경제상황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는 목도하는 바와 같다. 재벌은 여전히 한국 경제의 견인차 중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들의 상당수는 중소기업과 서민경제의 동반자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명백해졌다.

‘청년백수’ 100만과 비정규직 600만에 가계부채는 1000조원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은 저임금 노동자 비율 1위에 사회복지 지출 비율은 꼴찌 수준이고, 노동시간과 산재사망률은 모두 1위다. 그러니 40대 암사망률 세계 1위에 세계 최고 자살률과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일 수밖에 없다.

영국 신문 <가디언>과 <인디펜던트>는 양면 또는 전면에 자주 초대형 그래픽을 넣어 인상적으로 담론활동을 하는데, 국가 비교 그래픽에서 한국은 1·2위 아니면 꼴찌에서 1·2위인 경우가 많다. 좋은 1위도 있지만 부끄러운 랭킹이 더 많다. 한국이 얼마나 양극화돼 있고 경쟁적이고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있고 과로하는 사회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암담한 사회현실을 정치가 방치할 리는 없을 테니 총선 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의 여망이 컸다. 가장 보수적인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하고 김종인씨를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영입했으니 누가 집권해도 재벌개혁은 이루어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보수정당의 변신에 대한 기대심리는 한 여론조사에서 ‘경제민주화를 잘할 것 같은 정당은 새누리당’이라는 결과가 나올 정도로 높았다.

 

 

박 후보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가상현실을 믿게 만든 것은 언론이었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개혁인데 박 후보는 사실 애초부터 재벌개혁에 유효한 정책수단을 언급한 적이 없다. 논란과 갈등에 주목하는 언론의 속성상 김종인-이한구 등 여당내 경제민주화 논쟁이 크게 부각되면서 새누리당이 그 주역으로 떠올랐을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종인 위원장이 제시한 순환출자 금지 등 재벌개혁의 핵심 수단은 박 후보의 공약으로 채택되지 않았고 스스로 토사구팽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재벌개혁이 또 좌절된다면 김 위원장은 결과적으로 재벌의 수호자였다는 오명을 들을 수밖에 없다.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끼워넣은 공로자였던 그가 최소한의 명예라도 회복하려면 박 후보가 재벌개혁의 최대 걸림돌임을 선언해야 한다.

실은 재벌 중심 성장주의 정책의 본산인 보수당에 선거용 장식품으로 영입된 그가 모든 실세들의 저항까지 돌파하고 재벌개혁을 이룩할 거라고 본 언론의 해석이 원래 만화 같은 발상이었다. 여당 안에서 그나마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경제관료 출신들조차 뒷전이고, 수십년간 재벌 의존형 성장지상주의 경제의 이데올로그로 활약해온 김광두·안종범, 근본이 재벌 출신인 이한구·현명관 등이 주도하는 재벌개혁에 기대를 걸다니!

한국 정치사의 연장선상에서 오늘의 정치를 전망하지 못하고 경제사에서 현실경제의 교훈을 끌어내지 못하는 게 우리 학계와 언론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한겨레>는 종종 ‘인물의 역사’에도 어두운 면모를 드러낸다. 뉴스를 전망해주는 토요판 ‘다음주의 질문’에서 김종인·안종범을 ‘경제민주화론자’로 분류한 적도 있다. 그 기사(4월21일)에서 ‘이들은 정부가 개입해 시장의 실패를 조정해야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된다고 본다’며 ‘재벌이 이런 사람들을 좋아할 리 없다’는 분석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성균관대 교수였던 안종범 의원은 대표적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로 2007년 대선 때도 박근혜 후보의 ‘줄푸세’ 공약을 만든 주역이었다.

박 후보 진영은 신규 순환출자만 금지하면 된다고 하지만, 이는 암환자의 치료를 포기하고 그의 감기증세에 처방을 내리는 수준밖에 안 된다. 삼성 등 대재벌의 독과점과 한국 사회 지배는 현상유지가 아니라 더 강화되고 서민의 삶은 이명박 정권 때보다 더 팍팍해질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설명을 보더라도 순환출자는 1%의 지분으로 계열사 지분 60%를 지배하는 ‘뻥튀기 기계’나 다름없다. 박 후보는 ‘투트랙론’이라는 이름으로 성장을 다시 들먹이고, “정치의 본질은 민생”이라며 전국의 시장과 산업현장을 방문하는 ‘민생쇼’를 몇 달째 벌이고 있다. 한국 경제의 치유책은 악수세례가 아니라 재벌규제를 비롯한 제도개혁에 있음을 진짜 모르는가? 그는 15년 국회의원 생활을 하는 동안 민생법안을 한 건도 낸 적이 없다. 총선 때 약속했던 개혁법안조차 여당의 반대로 계류중이니 유권자에 대한 배신은 이미 시작됐다.

결국 이명박에 이어 정책 없는 메시아적 선동에 대중이 또 넘어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포기했으면 지지 후보를 바꿔야 하는데 메시아의 정치가 통하는 곳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선거 전 열망이 선거 후 실망으로 바뀌는 것은 예정된 코스다. 국회를 장악한 터에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의 행복을 추진하기는커녕 불행을 가중시킬 수 있다. 메시아의 허상을 벗기고 실상을 말하는 언론의 역할이 더욱 절실해진 이유다.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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