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스포츠] 프로스포츠에 빠진 여성 관중

야구장의 유혹 전체 관중 39%가 여자

도루를 시도하는 롯데 선수를 저지하기 위해 두산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자 롯데 관중석에서 외마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마! 마! 마!” (‘이놈아’의 준말 ‘인마’을 다시 줄여 쓴 말)

3루 뒤 관중석에서 두산 팬들이 송창식의 노래에 맞춰 답한다.

“왜~불러~”

2만 가까운 관중이 “마”를 외치는 함성도 위협적인 욕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여성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를 때도 부산 ‘아재들’의 거친 목청에 ‘아지매들’의 알토와 여고생들의 소프라노까지 합창을 이뤄 경기장 안팎으로 울려 퍼진다. 이곳이 바로 영국 공영방송 BBC까지 소개한 야구 응원의 메카, 사직구장이다.

▲ 사직구장에서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하고 있는 여성팬들. ⓒ 정혜정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는 30년 만에 관중 700만 시대를 열었다. 2008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2009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등 한국 야구가 국제대회에서 선전하고, 박찬호와 이승엽 등 해외파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로 복귀하자 경기장을 찾는 관중수가 점점 늘어났다. 여성 관중이 차지하는 비율도 커지고 있다. SMS리서치앤컨설팅에 따르면 지난해 야구장을 찾은 관객 중 여성의 비율은 39.2%에 이르렀다. 20%를 넘지 못하던 7년 전에 견주면 2배로 늘었다.

“축구장 찾는 것이 유일한 활력소”

축구도 다르지 않다. 2002한일월드컵 개최 이후 김남일이나 안정환 같은 선수들이 국민적 관심을 이끈 데 이어 2012런던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목에 건 뒤 국가대표 선수에 대한 관심이 프로축구 케이(K)리그로 이어지고 있다.

조현진(30ㆍ회사원ㆍ부산 수영구)씨는 부산아이파크 소속이던 송종국이 2002한일월드컵을 치른 뒤 페예노르트 로테르담(네덜란드)으로 이적을 앞두고 고별 경기를 할 때 처음 축구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상대는 포항스틸러스였어요. 그 경기가 저의 첫 K리그 관전이었어요. 이전에는 국가대표 경기를 챙겨보는 정도였는데 부산에도 지역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자연스레 부산아이파크를 응원하게 됐어요. 웬만하면 홈경기는 경기장에 와서 응원하는 편이에요.”

오후 8시에 퇴근해 집에 도착하면 10시, 여가 생활을 즐기기 빠듯한 그에게 축구는 유일한 활력소였다. 축구를 보지 않으면 허전하다는 그는 텔레비전 중계가 적은 K리그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기 시작했다.

“K리그 경기는 텔레비전 중계가 드물어 인터넷으로 봐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렇게 보느니 직접 경기장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게 됐어요. 응원하는 것도 재미있고 선수들 경기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취미도 있고요.”

예전엔 담배도 많이 피우고 분위기 험악했지만…

공중파와 케이블 스포츠 채널에서 시즌 전경기를 중계해주는 야구 팬들도 비슷한 이유로 경기장을 찾는다. 안방에서 중계를 보는 것보다 현장에서 응원 분위기를 직접 느끼기 위해 경기장으로 오는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롯데자이언츠 팬이었다는 조보경(구서여중2ㆍ부산 금정구)양은 시즌 중 한 달에 네 번은 가족들과 야구장을 찾는다고 말했다.

“텔레비전 중계로 보면 자세하고 좋지만 사직구장은 분위기가 좋고 경기 끝나고 선수들 퇴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예전에는 아저씨들이 담배도 많이 피우고 분위기가 험악해서 응원하기 불편했는데요, 요즘에는 그런 면이 사라져서 응원하기 좋아요.”

▲ 11월 8일, 구서여자중학교 학생들이 '2012 아시아 시리즈'에 참가한 롯데자이언츠 경기를 보기 위해 사직구장을 찾았다. ⓒ 정혜정

27년 째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하고 있다는 신달숙(43ㆍ자영업ㆍ부산 동구)씨도 20년 전에는 롯데가 지면 라면 국물을 던지고 욕설이 난무하는 등 경기장 분위기가 좋지 않아 오는 것을 꺼렸지만 지금은 남성적이었던 응원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편한 마음으로 경기장을 찾는다고 전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중들 인식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경기장 내부에서 흡연을 금한 뒤 아이들도 야구장에 데리고 다니는데요. 다같이 응원가를 따라 부르며 함께하는 모습이 교육적으로도 좋은 것 같아서 자주 찾고 있어요.”

함께 온 신경희(43ㆍ주부ㆍ부산 서구)씨도 “예전에는 여자 관중이 적어 야구장에 와도 제대로 환호성을 지르지 못했지만 요즘은 같이 응원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말했다.

어린 선수 많은 부산아이파크는 ‘아이돌파크’

여성 스포츠 팬의 증가는 응원 문화뿐 아니라 구단의 마케팅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SK와이번스는 송구, 타격 등 야구 기본기를 SK 선수 출신에게 직접 배우는 ‘여성 야구교실’을 열어 여성 팬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두산베어스는 2009년 시즌부터 매월 1회 특정 목요일을 지정해 ‘퀸스데이(Queen’s Day)’ 이벤트를 진행중이다. 이날 여성 관중들은 블루 지정석 이하 입장권을 2000원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으며 추첨을 통해 뽑힌 관중은 선수들과 포토타임을 갖는 등 다양한 혜택을 즐길 수 있다. 구단 차원의 이벤트는 변두리에 있던 여성 관중들을 끌어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여성 관중은 대개 선수에 대한 관심이 종목과 소속팀으로 이어져 경기장을 찾는다. 이런 여성 관중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각 구단은 온 힘을 쏟고 있다.

▲ 11월 11일 부산아시아드경기장에서 열린 부산 vs 경남 경기를 찾은 부산아이파크 팬들. ⓒ 정혜정

선수층 나이가 어리고 빼어난 외모를 가진 선수들이 많아 ‘아이돌파크’라 불리며 여성 관중을 흡수하고 있는 부산아이파크는 지난 6월 팬 백여 명과 선수단이 함께 놀이공원에 가 사진도 찍고 놀이기구를 타는 등 서로에게 잊지 못할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날 참여한 팬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부산아이파크의 여성 서포터즈 ‘이지스’에서 활동하는 조영화(23ㆍ부경대 법학과)씨는 여성 팬이 많은 만큼 여성 서포터즈가 있다면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란 생각에 ‘이지스’를 창단하게 됐다고 말했다.

“10월 3일 전북전 때부터 공식 활동을 시작했어요. 20명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지금 ‘이지스’ 팔로워 수가 900명이 넘었어요. 중고등학생부터 30대까지 연령도 다양하고요. 경기를 보러 서울에서 오는 팬도 있어요.”

사비로 제작한 홍보 자료를 돌리며 서포터즈를 알리기 위해 노력중인 그에게서 ‘축구 전문가’ 느낌이 풍기지만 사실 그는 1년 전만해도 K리그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을 보고 K리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연고지 부산에도 축구팀이 있다기에 경기장을 찾았는데요. 중계로 보는 것과 현장은 너무 달랐어요.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는데 현장에서 축구를 본 뒤 앞으로 축구장에 안 오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오고 있어요.”

‘이지스’ 회원들은 트위터 등을 통해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팬과 선수 사이 벽을 허물고 경기장에 오기 전 다른 팬과 당일 경기 관전 여부 등 정보를 주고 받으며 관계를 이어간다.

▲ 부산아이파크 여성서포터즈 '이지스' 회원들. ⓒ 정혜정

“여성 관중 한 명은 잠재관중 세네 명”

최동호 스포츠 평론가는 과거와 달리 커뮤니케이션 환경과 이야기 소재가 풍부해진 것이 수다 떨기 좋아하는 여성을 스포츠로 끌어오는 데 한몫했다고 말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 등을 활용해 경기나 그 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고, 커뮤니티를 통해 스포츠를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과 이슈소비 등이 가능해지면서 스포츠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소재가 된 것이 여성 팬 증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죠.”

이어 그는 경기 규칙 등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경기장에서 함께 응원하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환경과 구단측의 다양한 이벤트로 여성 관중이 늘어났다며 여성 팬이 불편하지 않도록 장기적으로 경기장 시설과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프로스포츠 발전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축구는 2002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인프라가 크게 개선됐고 야구는 구단 마케팅 효과로 경기장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경기장 분위기가 좀 더 가족적인 환경으로 바뀌면서 경기장 문화 자체가 긍정적으로 변화되고 있죠. 여성이 경기장을 찾는 것은 스포츠마케팅과 스포츠문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성 한 명은 관중 한 명이 아니라 잠재 관중 세네 명 증가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죠. 여성이 경기장을 찾으면서 가족 단위로 관람할 수 있는 분위기와 시설을 만드는 것이 프로스포츠의 활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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