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문학포럼 참석한 야라우슈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

독일 베를린 거리를 걷다 보면 때로 발에 딱 걸리는 명판(Stolpersteine)을 발견한다. 무심코 들여다보면 예전에 거기 살았던 유대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모두 나치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다.

“지나가다 본 사람들은 왜 그 사람이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유대인은 더 이상 개를 키울 수 없다’ ‘유대인은 공공수영장에 들어갈 수 없다’는 나치 시기 일부 표지판도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과거 있었던 억압을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거죠. 단순히 ‘그 체제가 나빴다’고 말하기보다 ‘갑자기 내가 공공장소에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없게 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콘라드 야라우슈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교수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관한 제2회 세계인문학포럼(11월1~3일) 기조연설에서 독일의 과거사 청산 경험을 들려줬다. 한국과 독일은 분단경험뿐만 아니라 청산해야 할 과거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한국이 일제강점기, 군사독재를 겪었다면 독일은 히틀러 나치와 구동독의 공산당 독재를 겪었다. 나치와 구동독의 독재 연구로 유명한 그는 6일 인터뷰에서 한국의 과거사 청산에도 필요한 조언을 들려줬다.

 

▲ 콘라드 야라우슈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교수. ⓒ 김정근

야라우슈 교수는 무엇보다 “비판적인 집단적·공식적 기억과 개인적 경험의 간극을 줄여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독일의 경우 정부나 지식인들은 나치에 대한 비판적 기억들을 가지고 있겠지요. 하지만 개개인들은 서로 도와가면서 살았던 따뜻한 공동체였다고 그 시대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대중들에게 비판적 기억들을 강요하는 게 가능하다고 오해하지만, 저는 개인적 경험들을 먼저 제대로 다뤄주고 이것을 독재의 억압적인 부분과 연관시켜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유신시절을 살아간 한국 사람들이 인혁당 사건은 모르지만 당장의 살림살이를 변화시킨 경제성장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유대인 명판’ 같은 장치는 개인적 경험과 독재의 억압을 연결시키게 만든다. “저의 아버지는 1942년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습니다. 2차 대전 때는 독일사람 1200만명이 연합국 폭격을 피해 동유럽으로 떠나기도 했지요. 그런데 왜 우리 아버지가 죽었나, 피란을 가게 됐는가를 되새겨볼 때 연합국보다는 나치의 잘못을 떠올리게 되는 겁니다.”

물론 독일과 한국의 현실은 차이가 있다. 독일의 전후 경제성장은 나치보다 민주주의가 더 좋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나치에 저항해 반파시즘을 외친 공산주의자들과 구동독의 스탈린주의 독재를 비판한 반공산주의자들이 서로 논쟁하는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두 체제의 폐해가 동시에 드러나는 것도 가능했다. 반면 한국은 친일 파시즘 세력이 군사독재 세력과 동일하고, 군사독재가 경제성장을 가져왔다고 믿는다.

야라우슈 교수는 “독일에서도 나치에 협력한 상당수 기업인, 학자, 전문집단이 엘리트 계층으로 자리 잡았고 책임을 회피하기도 했다”며 독일 또한 지난한 과정을 겪었음을 상기시켰다.


* 이 글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 황경상 기자가 경향신문에 보도한 기사를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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