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투표 시간 연장’ 외친 1인 시위와 촛불 문화제

 

▲ 18일 서울 종로 청계광장에서 김형근 청년유니온 사무국장이 '선거일 유급휴일 지정, 투표마감 오후 9시로 연장' 을 목표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박경현

18일 정오 서울 종로 청계광장에 한국방송(KBS)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주인공 ‘정 여사’가 나타났다. "투표 시간 너무 짧아. 늘려줘!"라고 쓰인 팻말을 손에 든 정 여사는 지난달 26일부터 견공 ‘브라우니’와 함께 꾸준히 국회, 광화문, 청계광장 등으로 출석 중이다. 이 1인 시위는 ‘선거일 유급휴일 지정, 투표마감 오후 9시로 연장’을 목표로 청년유니온이 처음 시작한 것을 지난 16일 발족한 시민단체 연대조직 ‘투표권보장공동행동’이 이어받아 펼치는 퍼포먼스다. 시민과 활동가들이 돌아가며 정 여사를 맡고 있는데 이날의 정 여사는 김형근 청년유니온 사무국장.

“투표시간 연장 개정안이 국회에서 무산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1인 시위에 나섰어요. 이번 대선에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법 개정이 시급합니다.” 

 

▲ 18일 서울 종로 청계광장에서 '정 여사' 김형근 청년유니온 사무국장과 함께 투표시간 연장을 요구하며 시위 중인 브라우니. ⓒ 박경현

같은 시간,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는 문재인 대선후보 시민캠프의 인태연 공동대표가 ‘투표시간 연장! 무엇이 두렵습니까?’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자리 잡았다. 민주통합당은 지난 3일 문재인 시민캠프에 투표시간 연장을 위한 특별본부를 구성하고 15일부터 이 같은 1인 시위를 이어오고 있다. 

시민단체들과 민주통합당이 이처럼 각각 투표시간 연장 시위에 나선 것은 지난 9월 18일 국회에서 새누리당의 반대로 투표시간 연장안 처리가 무산됐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투표일이 공휴일이라 시간을 연장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충분히 투표를 할 수 있고, 투표시간을 연장하면 불필요하게 많은 예산이 소요된다’며 개정안에 반대했다. 또 대선을 70여 일 앞두고 민주통합당에 유리한 쪽으로 선거법을 개정하려는 데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자영업자·비정규직 노동자 참정권 가로막는 현실

 

▲ 18일 문재인 대선후보 시민캠프의 인태연 공동대표가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투표시간 연장을 위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박경현

인 대표는 현행 선거법상 투표시간이 충분하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이 서민들의 실제 생활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못 박았다. 인 대표는 전국유통상인연합회 회장이기도 하다.

“자영업자들은 오후 6시 안에 영업을 끝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또 공휴일이라고 무조건 일을 쉬는 것도 아닌데요, 이건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이나 사용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임금생활자도 마찬가지죠. 노동자의 권리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유럽과 투표시간을 비교하는 말들이 있는데, 자영업자·비정규직의 노동 시간이 월등히 긴 우리를 그들과 비교하는 건 무리예요. 현실적인 투표 시간을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선거일은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법적으로는 관공서와 공무원들에게만 휴일이다. 많은 기업이 이 규정에 따라 자체적으로 선거일을 휴일로 지정하고 있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다. 2011년 한국정치학회의 조사에 따르면 18대 총선 투표에 불참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64.1%가 ‘투표할 마음이 있었지만 고용계약상의 문제로 투표장에 가지 못했다’고 답했다.

 

▲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근로자 투표참여 실태조사에 관한 연구. ⓒ 한국정치학회

인 대표는 대선을 앞두고 투표 연장 시위를 벌이는 것은 정치적 계산에 따른 행위라는 새누리당 주장에 대해 “그동안 지지부진했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사안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과거에 투표시간 연장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대선을 앞두고 불리할 것 같으니 말을 바꾸는 게 오히려 정치적이라는 주장이다. 

민주통합당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지난 18대 국회 때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이 투표시간 연장에 관한 개정안을 발의했던 것을 지적하며 새누리당의 말 바꾸기를 비난했다. 윤관석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양정례 한나라당 의원이 2009년 4월 대표 발의한 이 일부 개정안에는 노철래, 김을동 등 당시 친박연대 소속 의원들이 동참했다”고 밝혔다.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투표시간을 24시까지 연장하는 것으로, 현재 민주통합당이 요구하고 있는 ‘3시간 연장’보다 높은 수준이다. 현행 투표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12시간이다.

선거관리 비용이 국민의 권리보다 중요한가

민주당과 시민단체들은 1998년 일본이 투표 종료시간을 2시간 늦춘 후 네 차례의 중의원 선거에서 투표율이 10% 가량 높아진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비슷한 효과를 거둘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반면 새누리당 의원들은 투표시간 연장이 투표율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며 시간을 갖고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서울 종로 청계광장에서 투표권보장공동행동의‘투표권 보장을 위한 10만 국민청원 서명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들. ⓒ 박경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시간을 2시간 연장할 경우 선거관리비용이 약 100억 원이 더 들 것으로 예상했고, 국회 예산처는 31억 원 정도로 추산했다. 인 대표와 함께 시위에 나선 문재인 시민캠프의 2030네트워크팀 이인애 씨는 “투표 시간 연장은 헌법상 권리인 참정권, 투표권을 보장하는 일이므로 비용으로만 재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4·11 총선 때 처음 시행한 재외국민 투표의 경우, 약 530억 원의 비용을 들였지만 230만여 재외국민 중 2.5%만이 참여했다. 그럼에도 비용 낭비를 이유로 재외국민 투표를 없애지 않는 것은 국민의 참정권 보장이 비용으로만 따질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라는 게 시간 연장을 주장하는 측의 생각이다.

‘성의’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 투표 못 하는 사람들 

이정현 새누리당 대선후보 공보단장은 지난 2일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투표는) 성의의 문제이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며 시간 연장에 반대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박용진 대변인은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투표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해 시간에 쫓겨 투표하지 못한 국민을 성의 없는 인간들로 폄하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투표권보장공동행동도 발족 기자회견에서 “일부 정치인과 정당이 ‘투표는 성의의 문제’,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식의 정략적 관점으로 투표권 문제를 대선 이후로 미루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유감을 표했다. 투표권보장공동행동은 ‘정여사 1인 시위’ 퍼포먼스와 온오프라인 상에서의 ‘투표권 보장을 위한 10만 국민청원 서명운동’ 외에 매일 저녁 ‘성의 있는 촛불들의 투표권 보장 촛불문화제’도 열고 있다. 유권자의 ‘성의’를 촛불로 보여주겠다는 취지다.

 

▲ 18일 서울 종로 영풍문고 앞에서 열린 ‘성의 있는 촛불들의 투표권 보장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시민들. ⓒ 박경현

18일 저녁 7시 반, 서울 종로 영풍문고 앞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는 3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투표하고 싶어도 시간을 낼 수 없었던 사연을 쏟아냈다. 청년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주거협동조합 ‘민달팽이유니온’의 권지웅(24) 대표는 지난 총선 당시 휴학하고 거제도 삼성중공업에서 보조로 일했던 친구의 사례를 소개했다. 기숙사에서 오전 7시에 나와 저녁 8시에 돌아오는 생활이라 주소지가 거제인 사람도 투표하기 어려웠고 부재자 투표는 더 빠른 오후 4시 마감이라 엄두를 못 냈다는 사연이다. 한지혜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투표장에 갈 수 없었던 한 학생의 상담 사례를 소개했다.

 

▲ 청년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주거협동조합 ‘민달팽이유니온’의 권지웅(24) 대표가 18일 열린 ‘성의 있는 촛불들의 투표권 보장 촛불문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다. ⓒ 박경현

 

▲ 18일 서울 종로 영풍문고 앞에서 열린 ‘성의 있는 촛불들의 투표권 보장 촛불문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한지혜 청년유니온 위원장. ⓒ 박경현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위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사장이 화장실에 간 사이 손님이 올 지도 모르니 페트병에 용변을 해결하라고 했다더라고요. 그런 상황에 투표하러 다녀오겠다고 말이나 꺼낼 수 있겠어요?”  

이날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구로청년회 소속 정현익(35)씨는 “법적으로 보장됐는데도  실질적으로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권리가 많은 것 같다”며 “실질적인 투표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투표 시간이 꼭 연장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투표권보장공동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투표시간 연장을 위한 2030국민행동’은 앞으로도 매일 오후 7시 30분 같은 장소에서 촛불집회를 열기로 했다. 특히 10월 20일과 25일, 11월 4일은 ‘투표시간 연장을 위한 국민행동 데이(DAY)'로 지정하고 대규모 촛불문화제와 콘서트를 열 계획이다.

 

▲ 18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 1인시위 현장에서 종로 영풍문고 앞 ‘성의 있는 촛불들의 투표권 보장 촛불문화제’로 자리를 옮겨잡은 브라우니. ⓒ 박경현

 

▲ 18일 서울 종로 영풍문고 앞 ‘성의 있는 촛불들의 투표권 보장 촛불문화제’에 모인 30여 명의 시민들은 투표시간을 연장하고 투표일을 유급휴일로 지정할 것을 촉구했다. ⓒ 박경현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