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구조조정 점검] <중> 학과 통폐합에 재학생·교수 반발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원광대학교(총장 정세현)는 60년 전통의 사립대학으로 의학계열과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까지 갖추고 있으며 14개 단과대학에 재학생이 1만 7천여 명이나 된다. 이 학교는 ‘인문학이 살아 숨 쉬는 도덕 대학’을 표방하면서 개교 이래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데 힘써왔다. 매 학기마다 개설하는 ‘글로벌특강’에서는 국내외 석학에게 강의를 들은 뒤 토론과 글쓰기 연습을 하고, 인문학연구소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을 위한 ‘시민인문강좌’를 무료 개설했으며, 교내 ‘후마니타스 장학금’을 통해 독서와 토론을 장려하기도 했다.

▲ 전북 익산에 있는 원광대학교 전경. 지역 유명 사립대인 이곳은 작년에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돼 불명예를 안았다. ⓒ 원광대학교 공식 블로그

하지만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가 선정한 '부실대학‘에 포함되면서 인간다움(후마니타스)을 강조하는 교육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할 위기에 놓였다. ’집중적 컨설팅을 거쳐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유도 하겠다‘는 교과부의 방침에 따라 상대적으로 취업률과 재학생충원율이 낮은 인문학과들을 폐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철학·미술·정치 등 인문사회예술 학과 줄줄이 간판 내려 

원광대는 지난해 8월 ‘정부재정지원 제한대학’과 ‘학자금대출 제한대학’으로 동시 선정됐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이 학교는 지난 3월 취업률과 재학생충원율이 하위 15%에 속하는 학과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부실대학여부를 결정하는 데 취업률과 재학생충원율이 주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대상이 된 학과는 한국문화학과, 철학과, 순수미술학부 한국화전공·서양화전공·환경조각전공, 정치행정언론학부 정치외교학전공 등 대부분 인문사회 및 예술계열이었다.

학교는 공청회나 교수회의 등 여론수렴 과정도 없이, 교과부가 지정해준 회계법인의 컨설팅에만 의존해 11개 학과 폐지를 결정했다. 하루아침에 폐지 대상이 된 학과의 학생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학생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 뒤 ‘삼보일배’ 시위와 ‘본관 앞 108배’ 등을 벌이며 구조조정 철회를 요구했다. 철학과 이상곤, 도예과 정동훈, 환경조각과 이강원 교수 등은 11일간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 학과폐지에 반대하는 원광대 학생들이 본관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 박영준
시위 과정에서 삭발까지 했던 김용욱(독어독문4) 총학생회장은 지난 3월 27일 <한겨레> 기고를 통해 “부실대학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학교와 재단에 있고, 근본적으로는 정부의 열악한 재정지원에 있는데도 예술과 기초학문이 대학 위기의 근원인 양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문정우(정치외교4) 비상대책위원장은 11일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구조조정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컨설팅을 맡은 회계법인이 학생 수만 놓고 판단해 30년이 넘은 전통 있는 과를 폐지하는 것은 어이없는 처사”라고 성토했다. 

정읍에서 고교 윤리교사를 하고 있는 원광대졸업생 김윤섭(30․철학과졸)씨는 학과 홈페이지에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이고 인성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대학이 취업률을 근거로 이것을 폐지한다면 진정한 사회 시민 보다 취업만이 목표인 자기중심적 사람들을 양성하게 될 것”이라며 학과 폐지 결정을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폐지 대상 학과는 아니지만 대학이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편되는 것을 우려해 함께 반대운동을 나섰다는 치과대 학생회장 박영준(22)씨는 “이번 구조조정의 주요 지표 중 하나가 ‘재정기여도’였는데 이것은 투자한 만큼 이윤이 나지 않으면 퇴출시킨다는 기업 논리”라며 “대학이 기업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지난 3월, 원광대 학생들이 서울 대학로에서 학과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촛불문화제를 하고 있다. ⓒ 박영준

지역 예술인들도 폐지 반대 목소리 

순수미술학부와 무용학과가 폐지된다는 소식에 지역 예술인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미술협회 익산지부 회원들은 지난 3월 29일 성명서를 통해 “익산미술협회 구성원 대부분이 원광대 미대 출신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긍심을 갖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며 ”순수미술 4개학과를 취업률이라는 경제적 논리로 폐지한다면 지역예술문화의 근간을 절단하여 고사시키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한국무용협회 익산지부도 4월 2일 성명을 내고  “익산은 무용예술이 매우 낙후되어 있던 지역이었으나 1980년 원광대에 무용학과가 생기면서 훌륭한 교수님을 초빙해 전라북도 무용계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면서 “경제적 논리만을 앞세워 폐과를 단행할 게 아니라 선조들의 예술혼을 보존하고 후세에 남겨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안팎에서 반발이 거세지자 학교 측은 학내 의견을 수렴해 6개 학과만 폐지하고 8개 학과는 통합하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5월 22일 발표된 최종 구조조정안에서 폐지가 확정된 학과는 한국문화학과와 독일문학 언어전공, 프랑스문화 언어전공, 정치외교학, 인문사회자율전공학부, 자연과학자율전공학부 등이다. 이들 학과는 2013학년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는다. 다만 재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전공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보장받고, 교수들은 교양학부로 소속이 바뀐다. 이와 함께 국악전공과 음악전공은 음악과로, 무용전공은 스포츠과학부와 통폐합해 스포츠산업 복지학과가 됐다. 도예, 한국화, 서양화, 환경조각전공은 미술과로 통폐합했다. 이런 수정안으로 ‘총장 사퇴’까지 요구했던 비난 여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지만 학교측이 철학과 폐지를 2년 후 재논의하겠다고 밝혀 논란의 불씨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예술과 기초학문 숨죽이고 취업지도교수제 등 강화 

실용학문 외의 인문학과를 대거 통폐합한 원광대에는 ‘취업지도교수 제도’가 새로 생겼다. 각 과 전공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취업에 도움 되는 요령 등을 세세하게 지도하고, 일자리까지 알선해 주는 제도다. 또 ‘취업상담사 제도’를 신설해 단과대 마다 취업 전문가가 상주하면서 학생들의 자기소개서 쓰기, 채용면접 요령 등을 조언하고 있다. 이렇게 취업지도에 ‘올인’한 결과 1년 만에 원광대의 취업률은 2011년 45.2%에서 2012년에 66.8%로 약 21%포인트 상승했고, 올해 ‘부실대학’에서 탈출했다.

지난해 원광대와 함께 재정지원제한대학에 포함된 대전 대전대와 청주 서원대도 학과통폐합을 단행했다. 대전대는 철학과를 폐지해 신입생모집을 중단했고, 재학생들만 졸업까지 학점 취득을 보장하기로 했다. 또 국어국문창작학부를 단일학과로 축소하고 정원을 80명에서 60명으로 줄였다. 생명과학과와 미생물생명공학과는 생명과학부로 통합됐고, 사회체육학과와 경호무도지도학과는 체육학부로 통합했다.

▲ 충북 청주에 있는 서원대학교 전경. 2012년도 정부재정제한대학으로 선정된 이곳은 인문학과 폐지를 골자로 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 서원대학교 페이스북
서원대는 취업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컴퓨터교육학과와 독어독문학과를 폐지하고 △제약공학과 △사회복지학과 △화장품과학과 △식품공학과 △항공호텔서비스학과 등 취업에 유리한 학과를 신설했다. 폐과 대상 학생들은 지난 5월 교내 시위와 함께 트위터를 통해 ‘폐과 대상 학과를 살려 달라’고 공개적 호소를 했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트위터에서 “취업률이 낮은 학과를 없애 버리거나 병합해서 학생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대학들이 있다”며 “차라리 취업대기소라고 간판을 바꾸는 건 어떨까요”라고 호응하기도 했다.

최근 ‘여의도 칼부림 사건’ 등 사회․경제적 고립상태에서 혼자 분노를 키우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절망범죄’가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 한편에서는 경쟁지상주의를 반성하고 ‘사람’에게 관심을 갖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서울대, 성공회대 등에서 개설한 ‘최고경영자 인문학과정’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기업들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대학은 구조조정의 채찍에 쫓겨 취업률을 기준으로 학문을 줄 세우면서 인문학을 홀대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의장 조희연(성공회대) 교수는 “사회과학부터 자연과학까지 모든 학문은 풍부한 인문학적 기초가 있어야 발전이 가능한데,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문학과를 폐지하는 것은 상당히 천박한 논리”라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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