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칼럼] 스포츠 저널리즘의 진보영역은 재미 추구 + 비평 기능
국가주의·경제효과 등 ‘메가이벤트 신화’에서 벗어나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스포츠에 관심이 적은 한국인은 올여름 올림픽 이야기의 융단폭격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영국이나 독일에서는 선술집인 펍에서 맥주 한 잔 시켜놓고 스포츠 중계방송을 즐기지만 오히려 월드컵이나 올림픽 기간에 중계를 보여주지 않는 술집들도 생긴다. ‘축구 없는 구역’이란 뜻인 ‘풋볼 프리존’이나 ‘올림픽 프리존’ 같은 안내판을 내건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소수자 배려 문화’가 없나 싶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올림픽 프리존’이 있기는 했다. 알고 보니 ‘방마다 대형 티브이를 설치해 올림픽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나.

오랜 기간 세계 주요국 언론들을 모니터링해오면서 내린 결론은 우리만큼 거국적으로 스포츠 메가이벤트에 몰입하는 나라가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월드컵과 올림픽의 개최국인 독일과 영국에서도 보도를 절제하면서 스포츠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을 위한 갖가지 배려를 했다. 인터넷에서는 <비비시>(BBC)뿐 아니라 <가디언>과 <더 타임스>도 ‘올림픽 감추기’(Hide Olympic) 배너를 클릭하면 올림픽 기사가 사라진 별도 홈페이지로 이동했다. 주최국인데도 올림픽이 머리기사를 차지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

<비비시>가 8월4일 상당히 비중 있게 보도한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 기사도 세 번째로 취급됐는데, 머리기사는 시리아 사태를 다룬 것이었고, 두 번째는 북한 홍수 기사였다. 우리 언론에서는 시리아 사태는 물론 북한 홍수 기사도 올림픽에 밀렸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축구 같은 큰 이벤트가 있을 때 권력층 비리 등 한국 사회 주요 현안들이 언론에서 사라지는 일은 늘 반복된다.

<한겨레>가 올림픽 기사를 세 번만 1면 머리기사로 올리고, ‘용역폭력’ ‘녹조현상’ ‘공천헌금’ 등 현안들을 계속 추적한 것은 의지가 엿보이는 보도태도였다. ‘런던 클로즈업’처럼 특파된 기자가 경기장 안팎에서 주워담아 전해준 읽을거리들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진보신문이 스포츠 저널리즘 영역에서 보여줄 수 있는 차별성인 비평 기능은 너무 약해 보였다. 그런 맥락에서 문화·스포츠 에디터의 칼럼 ‘또 하나의 감동’(16일)은 일부 내용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한국의 언론들도 ‘애국주의나 금지상주의의 틀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평가해줄 만큼 변화한 것일까?

대한체육회는 ‘금메달 10개, 종합순위 10위’를 목표로 잡았는데, <한겨레>에서도 금메달 순위가 곧 종합순위로 통했다. 메달집계표도 금메달순이었다. 미국·캐나다·일본 등이 총메달수로 순위를 매기는데, 한국에서는 <한겨레>만이라도 총메달수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어땠을까? 금메달만 중시하는 건 2등을 ‘실패’로 보는 일등지상주의 소산이다. 금메달 순위로 보면, 학교체육과 사회체육의 기반이 튼튼해 진짜 스포츠 선진국으로 불리는 덴마크가 29위, 스웨덴이 37위, 핀란드가 60위였다.

 

올림픽에 끼어든 자본의 문제, 특히 엘리트체육과 일등주의를 부추기는 재벌의 올림픽 스타 마케팅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고 합숙을 금하는 등 학교체육을 정상화하려는 학교체육법안에 박용성 체육회장은 신문에 칼럼까지 기고하며 반대했다. 운동만 하던 선수들은 끝내 메달을 따지 못하면 정상적 사회활동을 하기 힘들어 빈민층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많다. ‘금메달 따면 부자 되나요?’(11일) 기사에서 ‘올림픽에 열광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과 공평한 대가’가 ‘올림픽에서는 그나마 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온전한 설명은 아니었다.

전경련이 한국의 메달 28개 중 22개가 10대 그룹이 협회장 등을 맡아 후원한 종목이라고 홍보했지만, 그것은 정부가 학교체육과 생활체육을 방치하고 있는 사이 재벌이 메달을 딸 수 있는 엘리트 중심으로 스포츠를 좌우해왔음을 반증한다. 메달을 딴 선수가 기자회견 도중 도착한 재벌회장에게 인사하고 기념사진까지 찍는 장면은 상업주의와 자본에 예속된 한국 스포츠의 본모습이다.

<한겨레>가 짚어줬으면 했던 또 하나의 관점은 올림픽을 국가대항전으로 몰고 간 국가주의 분위기였다. 올림픽 헌장도 올림픽은 개인간 경기이지 국가간 경기가 아니라고 천명했는데 우리 언론은 메달 획득을 ‘국위선양’으로 찬양하기 바빴다. 국가주의가 극명하게 표출된 것은 축구였다. 축구에는 그렇지 않아도 경기 전에 유독 양국 국가를 부를 만큼 국가주의가 스며들어 있다.

세계 최강과 맞붙은 브라질전 때 든 기분은, 한국이 이기면 또 얼마나 요란하게 한국 사회를 뒤흔들까 하는 걱정이었다. <한겨레>도 이미 ‘4강 신화’로 1면 머리기사(6일)를 장식한 터에 ‘신화’ 다음은 무엇일까? ‘신화’를 낳은 엘리트체육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대다수 국민들은 계속 운동부족 상태에 놓이지 않을까? 한국 사회 모든 현안도 ‘신화’ 속에 묻히지 않을까? 말을 못해 그렇지 ‘거국적 몰입’에 불편해하는 사람도 꽤 있다고 본다. 그런 사람들을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야말로 런던올림픽 개막식이 보여준 ‘다원화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터이다. 한국 승리에 대한 걱정은 흔쾌하게 우리 팀을 응원할 마음을 되찾게 해달라는 소망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한일전을 앞둔 절묘한 시기에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를 전격 방문함으로써 축구를 진짜 국가대항전으로 만들어버렸다. 정권이 곤경에서 빠져나오는 데 전쟁 다음으로 유용한 것이 스포츠란 말이 있다. 스포츠에서 정치와 자본을 분리해내는 일은 <한겨레>가 추구해야 할 스포츠 저널리즘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올림픽이 메가이벤트가 되면서 ‘올림픽의 저주’란 말이 나올 만큼 올림픽 개최국 또는 도시는 대부분 재정위기에 몰렸다. 국제대회를 유치한 영암, 대구, 부산, 인천에서 드러나듯 평창도 ‘경제효과 65조원’은 ‘허풍선’이 될 게 확실하다. 직접경제효과는 세금 투입 효과이니 더 큰 효과를 낼 투자처가 얼마든지 있고, 간접경제효과는 신기루에 가깝다. 국민 세금이 재벌 건설사 등 ‘토건족’ 주머니로 들어가고 주민이 시설 유지 비용을 계속 뜯기는 ‘야바위’나 다름없다. 스포츠 메가이벤트의 신화에서 우리는 언제 깨어날 수 있을까?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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