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런던] 두 번의 좌절… 올림픽은 4년 뒤 또 열린다

4년 전 승부는 찰나에 가려졌다. 13초 만에 무너질 실력이 아니었다. 8강전 갈비뼈 부상이 패인이었다. 올림픽 결승전에 선 왕기춘은 상대 선수의 ‘발목잡아메치기’에 경기 시작 13초 만에 한판패를 당했다. 경기장을 나와 카메라 앞에 선 왕기춘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미안합니다. 제 노력이 좀 부족했나 봐요”. 부상은 그 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53연승 세계랭킹 1위, 올림픽 부담 떨쳐버리려 했는데…
 
4년 전 베이징올림픽에서 냉혹한 승부의 세계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큰 시합에서 지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4년 뒤 그날을 위해 훈련에만 몰두했다. 올림픽 이후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했다. 2008 가노컵 국제유도대회를 시작으로 2010 수원 월드마스터스대회까지, 53연승을 이어갔다. 이원희가 갖고 있던 한국 연승 기록(48연승)을 갈아 치웠다.
 
승승장구했고, 2012 런던올림픽은 4년 전과 다를 거라 확신했다. 떨어진 체력은 지옥훈련으로 보완했고 기술은 더 완벽해졌다. 왕기춘의 특기는 업어치기다. 한쪽으로만 기술을 사용하는 선수가 많지만 왕기춘은 좌우 양쪽을 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런던에 입성했다. KBS 1TV 런던올림픽 특집 런던드림 ‘한 판’에 출연해 설레는 마음에 ‘닭살이 돋는다’고 표현할 만큼 올림픽을 기다려왔던 그였다.  

▲ 런던올림픽 특집프로그램에 출연해 올림픽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는 왕기춘 선수. ⓒ KBS 화면 캡처
 
“’금메달 따면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믿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올림픽 결승전이라는 건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잖아요. 그 자리에 한 번 들어갔는데 제가 또 다시 올라갈 거라고 상상하니까 닭살 돋아요. 그 자리는 정말 떨릴 것 같아요. 다시 가더라도.”

유도 남자 73kg급 세계 랭킹 1위 왕기춘은 다른 국제대회는 석권했지만 올림픽 정상에는 서지 못했다. 세계 챔피언인 그도 올림픽 무대에는 도전자였다.
 
“금메달이 목표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갖고 싶지는 않아요. 부담을 가지면 경기장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못할 수 있거든요. 부담을 버리고 실력 다 보여주고 나온다면 국민 여러분이 기대하는 메달 색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청자도 그도 부담을 갖지 않기를 바랐지만, 지난 4년을 누구보다도 절치부심한 그였다. 7월 30일,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한국 시각 오후 5시30분에 시작된 73kg급 경기. 3시간 동안 64강(유효승), 32강(한판승), 16강(유효승), 8강(판정승) 등 4차례 경기를 내리 이기고 오후 10시50분 준결승 무대에 올랐다.

또 부상, 그리고 석연치 않은 판정
 
만수르 이사예프(러시아)와 매트에 오른 왕기춘. 경기 시작 1분도 안 돼 두 선수에게 지도가 주어졌다. 소극적인 경기를 펼친다는 이유였다. 13초 뒤 왕기춘이 안다리걸기 기술을 시도했다. 공격은 실패했고 일어나던 왕기춘이 왼쪽 팔목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왼손을 움직이지 못하던 왕기춘이 심판 지시에 경기를 재개했다. 힘 좋은 이사예프를 상대로 남은 시간 꾸준히 공격을 시도 했지만 경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정규시간 2분30초를 남기고 지도 하나를 추가로 받은 왕기춘. 이사예프가 유효로 앞서 나갔다. 이대로 끝나면 결승 진출은 실패. 왕기춘이 반격을 시작했다. 이 상황을 지키기만 해도 결승에 진출하는 이사예프는 급할 게 없었다. 왕기춘은 마지막 1분간 공격을 퍼부었고 이사예프는 공격을 방어하기 바빴다.
 
“러시아 선수가 공격을 안 하고 있는데 왜 지도를 안 주는 걸까요. 안타깝습니다. 지도를 줘야 하는데요.” (KBS 해설 중)
“심판 판정에 대해 계속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그럴수록 저희가 추해지는 느낌이거든요.” (
SBS 해설 중)

▲ 8년을 기다려온 왕기춘의 꿈이 부상으로 또 한번 좌절됐다. ⓒ SBS 화면 캡처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지도 누적으로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아쉬운 한판이었다. 그리고 30분 뒤 동메달 결정전에 왕기춘이 출전했다. 부상으로 적극적인 공격을 보여주지 못한 왕기춘은 종료 2분40초를 남기고 지도를 받았다. 이후 다양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찬스로 연결하지 못했다. 종료 1분 전 상대 선수 우고 르그랑(프랑스)이 지도를 받아 경기는 다시 원점이 됐다.

그렇게 정규 시간 5분이 흐르고 다시 연장전. 공격을 주고받는 두 선수를 심판이 멈춰 세웠다. 왕기춘의 목 주위에서 피가 흘렀다. 왕기춘이 치료받는 동안 상대 선수는 숨을 골랐다. 1분 뒤 왕기춘이 매트에 드러누웠다. 르그랑의 밭다리걸기에 넘어가고 말았다. 절반을 내준 왕기춘은 동메달까지 날려버렸다.
 
4년 전 은메달을 목에 건 뒤 “다음 올림픽에서는 국민들이 바라는 색의 메달을 가져오겠다”던 왕기춘의 다짐은 또 4년 뒤로 미뤄지게 됐다. 그러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게 스포츠의 세계. 국내에도 세계 무대에도 스타들이 명멸한다. 4년 뒤 올림픽 무대에 다시 선 그를 볼 수 있을까? 그때 나이 아직 스물여덟. 어쩌면 두 번의 좌절은 8년을 기다려 해피엔딩으로 끝날 ‘인간 승리’의 굴곡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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