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칼럼]‘정책 실패’를 또 ‘사회적 비용’으로 처리하자고?
‘종편의 저주’ 부른 언론학자들 철저히 규명해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사르코비지옹’(Sarkovision), ‘MB씨’(MBC), ‘김비서’(KBS)… 사르코지와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프랑스와 한국의 공영방송 체제가 망가지면서 두 나라 민중이 만들어낸 촌철살인의 신조어들이다.

그래도 프랑스 ‘사르코지방송’은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 선거방송에서도 공평성과 형평성 원칙이 건재해 소수자들 목소리가 전달된다. 올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런 원칙이 없었다면 볼 수 없는 장면이 방송됐다. 반자본주의당 필리프 푸투 후보는 민영방송 <테에프1>(TF1)에 출연해 양극화 문제를 얘기하면서 그 방송사 사장을 걸고넘어졌다.

“부자라면 여러분도 잘 아는 분이 있죠. 이 방송사 사장님이신 마르탱 부이그 말이에요. 재산이 25억유로나 된다는 건 용납이 안 됩니다. 그들의 소유권을 박탈해야 합니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우리나라 같으면 ‘방송사고’ 상황이지만 프랑스 유권자들은 그런 소수의 견해도 듣고 투표한다.

프랑스 국민은 사르코지를 권좌에서 축출함으로써 여러 가지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방송사 파업의 원인제공자이면서도 “대통령이 언급하면 간섭이 될 수 있다”며 책임을 회피한다. 박근혜 의원도 책임지고 해결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친여 사장을 통한 공영방송 장악과 종편방송의 지원이 대선국면에서 긴요하기 때문인가?

방송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 종합편성채널 탄생도 두 사람에게 가장 큰 책임을 돌릴 수밖에 없다. 박 의원은 요즘 이명박 정권과 ‘구별 짓기’를 하는데 그거야말로 희박한 책임의식의 발로다. 대통령책임제이면서도 단임제를 채택한 나라에서 여당의 실세인 유력한 대선 후보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제도 자체가 모순이다.

탐욕의 대상이었던 방송정책은 정권이 끝나기도 전에 파국을 맞고 있다. 종편 추진 세력이 얼마나 미혹에 빠져 있었는지, 서울대 윤석민 교수 사례로 분석해보자. 종편 ‘개국(開局)공신’ 중 한 분이었던 그의 개국 당시 신문 기고문을 보면, 이리저리 종편채널을 돌려보며 감격스러워하는 표정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생존의 악다구니’를 쓰는 이들에게 일갈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고, 재앙이며 중단시킬 일이라는 것인가. 종래의 지상파에 종편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이 다양성이 재앙이란 말인가? 이 팽팽한 채널 간 경쟁이 재앙이란 얘기인가?”

‘경쟁지상주의’는 외환위기의 한 요인이었던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 때도 나왔던 ‘미신’이다. 산업조직학을 전공한 당시 유승민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현 새누리당 의원)이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미디어산업을 공부한 윤석민 교수는 반년도 안 돼 “(종편을)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사회적 비용이 들더라도 망할 사업자는 망해나가면서 ‘방송사업에 무작정 뛰어들어서 될 게 아니다’라는 좋은 경험으로 가져가면 된다”고 말했다. 학자가 말을 금방 바꾸는 신뢰성 문제는 접어두고라도, 자신들의 ‘정책 실패’를 늘 ‘사회적 비용’으로 처리하려는 태도는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외환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기득권세력의 탐욕을 ‘이론’으로 포장해준 학자들의 곡학아세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누구에게 전가되나? 방송사가 망했을 때 첫째 피해자는 종사자들이다. 신입사원은 물론이고 옮겨간 방송인들은 당장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다. 이직자들 중에는 유능한 방송인도 많았고, 공중파였다면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을 드라마나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도 있었으나, 플랫폼의 한계로 묻히고 말았다.

두 번째 피해자는 마지못해 종편에 참여한 기업과 광고 게재 압력에 시달리는 대기업이다. 한 대기업 경영자는 “모기업인 신문을 앞세운 광고 등쌀에 견딜 수가 없다”며 “종편 없애주는 정치인과 언론을 지지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세 번째 피해자는 종편에 진출한 언론사 자신들이다. 주로 일본과 미국에서 들여온 방송장비는 남 좋은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도급업체인 독립프로덕션들도 벌써부터 프로그램이 취소되거나 제작비를 못 받아 도산하는 업체가 나오고 있다.

네 번째로, 진짜 억울한 피해자는 시청자와 국민이다. 자기 뜻과 무관하게 공영방송 체제가 흔들리면서 질 높은 방송을 볼 수 없게 됐고, 여론시장 독과점이 심각해지면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권력 비리를 파헤치는 탐사보도나 시사고발 프로그램은 공중파와 종편 할 것 없이 대폭 줄어들고, 값싸게 제작하는 시사토크나 외국 프로그램이 판을 친다.

그러나 방송을 망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도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는 집단이 있다. 바로 언론학자들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언론학자들 중에는 유럽에 견주어 언론의 공공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미국을 표준으로 삼는 이들이 많다. 꽤 많은 연구비를 지원받고도 한국 언론의 현실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채 언론정책을 농단한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도 한국언론학회 등을 중심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서로 과오를 비판하지 않는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이제 한국 언론 수난사에 그들 이름을 등재할 때가 됐다.

윤석민 교수는 미디어법이 통과됐을 때도 신문 기고문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자칭 진보’가 악을 쓴다고 비난했다. “서비스의 품질과 다양성을 제고하며, (…) 사회적 소통을 진작시켜 선진화된 민주시민사회 실현을 앞당기려 함이었다. 미디어 진출을 꿈꾸는 젊은이에게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고자 함이었다. 더는 말이 필요없게 결과로 보여주어야 한다.”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으니 정말 말이 필요없게 됐다.

<한겨레>는 그동안 미디어법에 반대하는 등 종편을 일관되게 비판해왔으나 개국 이후 기사량이 현저히 줄고 비판도 종편 자체의 근원적 문제보다 졸속 제작이나 실수를 부각시키는 데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한겨레>는 23일치 사설에서 ‘방송 파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발벗고 나서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여당이 다수인 국회에 큰 기대를 걸 수 있을까? 그에 앞서 종편을 포함한 방송정책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유린해왔는지 규명해 방송개혁의 여론을 조성하고 책임자들을 특정하는 일이 진보언론의 급선무다.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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