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생 등 ‘1020세대’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만화세상 따라잡기’

“저는 학교에서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어요.”

서울의 한 고등학교 1학년인 김용진(17)군은 중학교 3년 동안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남들과 어울리는 법을 몰라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친구들이 저를 때리거나 괴롭히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아무도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았죠. 동네에도 친구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어요.”  

늘 외로웠던 용진군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애니메이션(만화)과 컴퓨터 게임이었다. 주로 일본 만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만화에 관심을 갖다보니 만화 캐릭터처럼 분장하는 ‘코스프레’에 자연히 관심이 이어졌다. 석 달 전쯤 한 인터넷 카페에서 일본의 슈팅게임(총 등 무기로 적을 물리치는 게임)인 ‘동방프로젝트’의 등장인물 코스프레를 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글을 발견한 뒤 본격적으로 코스프레의 세계에 빠지게 됐다.

▲ 김용진군(윗줄 오른쪽 세 번째)이 참여한 '동방프로젝트' 팀 코스프레. ⓒ 허정윤

마음 터놓을 사람 그리워 모이는 청소년들 

올해 2월 첫 코스프레 모임에 참여한 용진군은 그 곳에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또래들과 긴 대화를 나눴다. 당시 용진군은 의상을 준비하지 못한 채 나갔지만 관심사가 같다보니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지난 3월 31일 제108회 서울코믹월드 행사장에 나온 용진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첫 모임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모두들 만화와 게임을 좋아하다 보니 이야기가 금방 통하더라고요.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친구들을 많이 만들었죠. 세 번 정도 정모(정기모임)에 참여했더니 휴대폰에 전화번호가 30개나 늘었더라고요.”

용진군의 취미가 된 ‘코스프레’는 의상을 의미하는 ‘코스튬(costume)’과 놀이를 뜻하는 ‘플레이(play)’를 일본식으로 합성한 말이다. 영어식 표현은 ‘코스튬플레이’다. 현실문화연구가 펴낸 <대중문화사전>에 따르면 코스프레의 원조는 영국이다. 죽은 영웅을 기리기 위해 고인의 생전 모습으로 분장하는 예식이 있는데 이것이 일본의 ‘마니아 문화’와 결합하면서 코스프레 문화가 형성됐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에 코스프레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0년대 중반 천리안, 나우누리 등 피시(PC)통신에 관련 동호회가 하나 둘 생겨나면서부터라고 한다. 지금은 인터넷 커뮤니티 중 회원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코사모’의 회원수가 6만 5천명을 넘어섰을 정도로 저변이 넓어졌다.  

‘코믹월드’ 등 대규모 정기행사까지

코스프레 문화가 대중화하면서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코스어’들이 대규모 정기 행사도 열고 있다. 1999년부터 시작된 ‘코믹월드’가 대표적이다. 코믹월드는 만화 관련 업체인 에스이(SE)테크노가 주관하는 아마추어 만화인들의 축제로, 서울 양재동 에이티(AT)센터와 부산 컨벤션센터 두 곳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열린다.

이 행사에는 만화동아리들이 만든 창작품을 사고팔 수 있는 동아리 판매전, 만화노래자랑 대회, 일러스트 콘테스트 등과 함께 코스프레 콘테스트가 열린다. 이벤트와는 별도로 개인 및 동아리 차원에서 자유롭게 코스프레를 즐기기도 한다. 코믹월드 관람객들은 대부분 야외에서 코스프레를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으며 행사를 즐긴다. 지난 12일부터 이틀간 열린 제109회 서울 코믹월드에도 약 2000명이 방문해 성황을 이뤘다.

코믹월드에 참가하는 코스어의 대다수는 10대와 20대다. 그 중에서도 특히 10대 청소년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동방프로젝트의 캐릭터를 좋아해 용진군과 친구가 됐다는 S양(중학생)도 코스프레를 통해 탈출구를 찾은 경우. 

“학교에서 애니메이션 좋아한다고 하면 애들이 ‘오타쿠(한 분야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일본말)’라고 놀려요. 그런데 코믹월드에는 저랑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이 많잖아요. 코스프레 하는 친구들이랑 놀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많이 웃게 돼요. 코스프레에 대한 자부심도 생겨서 이제 누가 오타쿠라고 놀려도 그냥 무시해 버려요.”

이들처럼 10대 시절 코스어가 된 청소년들은 20대가 되어서도 코스프레를 취미로 삼는 경우가 많다. 남자친구와 함께 일본 고등학생들의 풋풋한 연애 이야기인 <토라도라>의 코스프레를 즐긴다는 안선미(26·여·회사원·서울)씨는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만화 캐릭터로 변신하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코스프레를 하고 있으면 마치 제가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했어요. 요즘도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면 코스프레 생각이 간절하죠. 마침 남자친구도 만화를 좋아해서 제가 코스프레를 같이 하자고 권했어요.”

▲ 애니메이션 <토라도라>의 주인공을 재현한 안선미 씨 커플. ⓒ 허정윤

어른들의 편견과 불온한 시선에 상처도

하지만 청소년 코스어들은 코스프레를 ‘일탈’로 보는 부모들의 시선 때문에 집에선 비밀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민수(19·고3·서울)군은 “코믹월드에 나오는 중고등학생 대부분은 부모님 몰래 나온다”며 “공부 안 한다는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한데 굳이 부모님을 설득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김용진군도 “우리 동호회 회원들 중에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활동하는 친구는 한 두 명 정도밖에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간혹 자녀의 손을 잡고 행사장에 나오는 어른도 있다. 지난해부터 딸의 취미를 이해하기 위해 코스프레 행사에 함께 나오기 시작했다는 주부 정선희(47)씨는 “아이들이 먼저 부모님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자기 할 일만 다 한다면 부모 입장에서도 아이들이 코스프레 하는 것을 반대할 명분이 없지 않겠어요? 모임이 매주 있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 딸이 코스프레를 하고 돌아오면 몇 주 동안은 별 말 안 해도 공부를 잘 해요. 아이들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데 그걸 막으면 부모 쪽에 오히려 문제가 있는 거죠.”

부모의 편견 외에도 청소년 코스어들은 자신들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어른 구경꾼들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민아(16·중3·서울)양처럼 짧은 치마나 몸에 붙는 옷을 선호하는 코스어들이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코스프레 하러 나온 사람들은 대체로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간혹 야한 포즈를 요구하는 사진사들이 있어서 짜증이 나요. 특히 치마를 입고 있는데 아래에서 찍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요.”

코스프레 전문 블로그를 운영 중인 천혈준(23·필명)씨는 “코스프레에 대한 기성세대들의 잘못된 시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우호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청소년들의 코스프레를 맹목적인 일본 대중문화 추종으로 보는 인식부터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스프레가 일본에서 넘어온 것은 맞죠. 그런데 어디서 왔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요. 문화라는 건 어떤 식으로 응용해서 받아들이는지가 더 중요한 거잖아요.”

▲ 천혈준 씨가 시도한 영화 <최종병기 활>의 코스프레. ⓒ 천혈준

‘일본색’ 빼고 우리 문화에 자연스레 녹이는 노력 필요 

천씨가 고민 끝에 생각해 낸 응용방법은 코스프레에 한국적인 색을 가미하는 것이다. 최근 그는 ‘사극 코스프레’를 시도하고 있는데, 영화 <최종병기 활> 코스프레는 지난해 10월 강남문화재단이 주최한 ‘2011 강남 패션페스티벌’ 코스프레 부문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천씨는 코스프레를 일부 마니아들의 일탈로 생각하거나 코스어들을 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기 위해 언론보도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언론이 만화나 게임 때문에 청소년들의 폭력성이 늘어난다는 식의 논리를 코스프레에도 적용해서 왜곡된 인식을 확산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애호가들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코스프레를 즐기는 사람들 스스로가 블로그를 만들어서 완성도 높은 사진을 올리고 ‘악플’을 다는 사람들과도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어요. 이런 노력이 있어야 우리 사회에서 코스프레가 하나의 놀이문화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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