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다시 청계광장에 모인 시민들, 정치권․언론의 역할 촉구
2일 저녁 9시 무렵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안모(18ㆍ고2) 군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중단 범국민 촛불집회’의 무대에 올랐다.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겼지만 뭐가 옳고 그른지, 상식인지 아닌지는 잘 압니다. ‘누군가에게 선동 당했느냐'고 묻지만, 저는 이 나라에서 앞으로 90년은 더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어른들보단 훨씬 오래 살아야 합니다. 제가 살 나라를 보다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열여덟 살다운 발언에 좌중에선 웃음과 함께 박수가 터졌다. 학교 체육대회를 마치고 바로 달려왔다는 안 군은 중학생이던 4년 전 아버지 손을 잡고 난생 처음 ‘촛불’을 들었다고 한다. 사회를 맡은 참여연대 안진걸 민생희망팀장이 “학교에서 뭐라고 하진 않겠어요?”라고 걱정하자 호쾌하게 외쳤다. “시민의 몽둥이 분들이 체포만 안하신다면 내일 학교에 갈 수 있습니다.”
“4년 전의 약속과 다짐은 어디로 갔나”
안군이 14살이던 2008년 5월, 광화문 광장에는 ‘분노의 촛불’이 일렁거렸다. 국민의 건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허용하려던 정부는 ‘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위대에 고개를 숙였다. ‘광우병 위험이 낮은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만 수입하겠다’, ‘광우병이 발병하면 수입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광우병 감염소가 추가 발견된 지난 4월, 정부는 말을 뒤집었다. ‘수입 중단은 없다’고.
약 4년 만인 이날 다시 청계광장에 모인 5000여명(주최측 추산, 경찰추산 1500여명)의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높이 들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중단’이 이날의 주된 구호였지만 다른 목소리들도 함께 했다.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 햄 패트릭(45) 씨 등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외쳤고, ‘반값등록금’을 외치는 대학생과 ‘언론탄압 중지’를 외치는 언론노조원도 보였다.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등 야당 관계자들, 참여연대와 언론노조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 했다. 집회참가자보다 더 많은 경찰 병력이 청계광장 주변에 배치됐다.
노래로 시작된 촛불집회는 시민 발언이 이어지면서 점차 무르익었다. 시민들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학교 급식을 먹는 세 아이의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능선(49ㆍ서울 신대방동) 씨는 생활협동조합인 ‘아이쿱’의 조합원들과 함께 5월말까지 1인 시위를 이어가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무대 아래의 시민들도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4년 전 촛불집회에도 나왔다는 대학생 장현진(20ㆍ여ㆍ경기도 부천시) 씨는 대통령의 ‘약속 위반’을 성토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광우병이 발생했다면 수입을 중단하는 건 너무도 상식적인 것이구요.”
4살배기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주부 이시내(41ㆍ경기도 안양시) 씨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4년 전에 이어 이 자리에 다시 나왔다”고 말했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인데도 도리어 미국 농림부장관으로부터 ‘수입을 중단하지 않아 고맙다’는 얘기를 듣는 상황에 너무 화가 났어요. 유치원, 어린이집이나 단체 급식에 쇠고기가 사용될 텐데 주로 값싼 수입산 쇠고기를 사용하지 않겠어요?”
‘넥타이 부대’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박온서(42ㆍ회사원ㆍ경기도 수원시) 씨는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사안의 심각성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날 문화방송(MBC), 한국방송(KBS), 와이티엔(YTN) 등 노조가 파업 중인 가운데 대체인력 등으로 취재에 나선 방송사 등 언론사 취재진들이 시민들의 비난과 야유 속에 현장에서 쫓겨 나기도 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ㆍ검역 즉각 중단 요구
집회에 나온 이강택 언론노조위원장은 ‘대한민국은 허위와 거짓의 천국’이라고 성토했다.
“30개월 미만 소만 수입해 안전하다고 말하지만 연령을 제대로 구별하기 힘들고 도축장에서도 위험요소를 걸러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언론 장악이 계속되는 한 미국산 쇠고기의 ‘진실’은 알려질 수 없습니다. 언론노조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우리의 주권을 되찾고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주요 정치권 인사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통합민주당 문성근 대표권한대행은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정부는 광우병 발견 즉시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신문광고를 냈지만 버시바우 당시 주한미대사는 박근혜 의원을 만나 수입이 중단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며 정부가 국민을 속였음을 지적했다.
통합진보당 강기갑 의원은 “정치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그 몫을 국민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 같아 죄송스럽고 마음이 무겁다”며 “지난 4•11 총선을 통해 국민이 깨어나야 정치가 바로 잡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만큼, 국민들이 앞으로도 정치 사안에 대해 꾸준히 문제의식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이날 해산을 종용하는 경찰의 방송 속에서도 밤 10시까지 집회를 계속한 뒤 헤어졌다. 주최 측은 3일과 4일에도 청계광장에서 촛불집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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