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착취도시, 서울

착취도시, 서울/이혜미 지음/글항아리/1만3000원

착취도시, 서울 표지. ⓒ 글항아리
착취도시, 서울 표지. ⓒ 글항아리

부모의 울타리 밖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대학 시절, 주머니 형편에 맞춰 삶의 질을 결정했다. 4년 동안 내 삶의 질은 주거환경에 따라 바닥을 쳤다가 조금 나아지기를 반복했다. 학보사 기자 생활을 하던 2017년, 직접 겪어온 주거 빈곤 문제를 제대로 보도하겠다는 생각으로 서울 창신동 쪽방촌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어느 할아버지는 키가 175센티미터(cm)였는데, 두 발을 뻗고 잠들 수 없을 정도로 좁은 1평짜리 방에 살고 있었다. 1평 남짓한 쪽방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가난과 외로움의 냄새가 도사렸다. 여름엔 곰팡이가, 겨울엔 입김이 피어오르는 열악한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줄 게 이것밖에 없다”며 작은 냉장고에서 미지근한 우유 한 팩을 꺼내 건넸다. 가슴에 턱 얹힌 그 우유를 삼키며 쪽방촌 사람들의 고달픈 겨울을 신문 한 면에 채웠다. 하지만 그 후에도 창신동은 줄곧 같은 모습이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쪽방촌의 서글픈 현실을 보도해왔지만,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19년 5월,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가 쪽방 임대 사업의 이면을 밝혔다. 쪽방촌 주민의 약점을 공략해 부를 증진한 강남 부자들의 비윤리적이고 약탈적인 임대행위를 낱낱이 고발한 것이다. 부조리의 구조를 해부학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참신한 취재 기법, 그리고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또 다른 출발점을 제시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징검다리다.

강남 아파트보다 비싼 쪽방 1평

이혜미 기자는 2018년 국일고시원 화재 사건 취재를 시작으로 주거 빈곤층의 현실을 밝히려 열을 올렸다. 서울시 쪽방촌의 등기부 등본과 건축물대장 등을 열람하고 데이터를 모아 시각화했다. 여러 달에 걸친 탐사 취재 끝에 이 기자는 쪽방촌 주민들을 대상으로 폭리를 취하는 건물 소유주의 실체를 드러냈다.

창신동 쪽방들을 소유한 사람은 강남 타워팰리스 등에 거주하는 부유층이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일가족이 여러 건물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쪽방촌 전체로부터 임대 소득을 올렸다. 평당 임대료는 20만 원이었다. 얼핏 저렴해 보이지만, 서울 전체 아파트의 평당 평균 월세인 4만 원의 5배가 넘는 금액이다.

이들은 쪽방촌 주민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비상식적으로 이윤을 창출해온 것이다.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만은 피하고 싶은 쪽방촌 주민들은 월세가 오를까 봐, 쫓겨날까 봐 항상 두려웠다. 천장에 구멍이 나고 변기가 고장 나도, 수리해달라는 요구조차 하지 못했다.

‘빈곤 비즈니스.’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되, 빈곤을 벗어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 ‘빈곤을 고착화’하는 산업. 가뜩이나 돈 없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마땅한 노력 없이 불로소득으로 폭리를 취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관심을 보이는 행태. (<착취도시, 서울>, 58쪽)

서울시 창신동 쪽방촌의 한 월세방으로 한 달 월세가 17만 원이다. ⓒ 연합뉴스
서울시 창신동 쪽방촌의 한 월세방으로 한 달 월세가 17만 원이다. ⓒ 연합뉴스

‘집주인’이란 단어가 던진 단서

취재의 출발은 작은 단서였다. 이혜미 기자는 처음 만나 인터뷰한 쪽방 주민이 “우리 집 주인”이라고 말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쪽방에도 주인이 있다는 단서가 젊은 기자의 가슴에 불씨를 심었다. ‘집주인’의 정체는 기자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집주인’, 이 한 단어가 유리 조각처럼 머릿속에 콕 박혔다. (중략) 몇 시간이 걸리는 일일지도 계산하지 않고 다짜고짜 ‘우리 집 주인’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박 씨가 사는 쪽방 건물의 등기부 등본을 가장 먼저 열람했다. (<착취도시, 서울>, 47~50쪽)

이 기자는 인근 건물들의 주소를 하나씩 정리한 뒤 등기부 등본을 열람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문서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창신동 일부 건물의 소유주가 전부 같은 성 씨를 공유하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대대로 쪽방 사업을 이어온 ‘강 씨 일가’를 발견한 것이다.

이 기자는 창신동 취재에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서울시가 발간하는 쪽방 관련 보고서 등을 꼼꼼히 훑고 정보공개청구 등을 통해 주요 자료를 입수하기 시작했다. 쪽방촌을 관리하면서 월세를 수금해주는 대신 집 주인에게 약간의 수수료를 받는 중간 관리인도 취재했다. 수십만 원의 사비를 들여 퇴근 시간 뒤 취재하는 열성으로 하나하나 사실을 모아 큰 기사의 얼개를 짜갔다.

이혜미 기자는 한국 언론의 문제 중 하나인 ‘보도자료 받아쓰기’를 거부하고 일차적 자료를 직접 입수해 확인했다. 신중하고 철저히 기초적 취재를 마친 뒤에야 데스크에게 기사 아이템을 보고했다. 이 책에는 그 취재 과정이 세밀하게 담겨 있다.

고발 보도, 그 후의 세상

2019년 5월 7일 <한국일보> 1면에 ‘쪽방촌 뒤엔… 큰손 건물주의 ‘빈곤 비즈니스'' 기사가 게재됐다. 최소한의 주거환경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의 주머니를 꽉 쥐고 있는 중간착취자, 그리고 다달이 수천만 원의 이르는 임대료를 챙기는 실소유주 등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기사가 나간 뒤 당사자 중 누군가는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고, 누군가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약탈에 시달리던 쪽방촌 주민들도 주거권 보장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해 10월 정부는 ‘아동 주거권 보장 등 주거지원 강화 대책’의 일부에 쪽방이나 고시원에 거주하는 취약계층을 위한 주거 정책을 추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쪽방촌 주민의 삶이 결정적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고, 임대료 걱정이 앞서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쪽방촌 주민을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에는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가난을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부유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주거빈곤 문제의 해결책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출발 지점이 달라진 것이다.

(중략) 쪽방 주민들은 엉덩이 한번 떼지 않고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눈빛을 반짝이면서 ‘쪽방 신문’에 메모를 틈틈이 하며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중략) “오늘을 계기로 이젠 집주인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겁니다. 아이캔 두잇(I can do it)!” 동네 주민들은 다 같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착취도시, 서울>, 113~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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