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2030] ‘길 없는 길’을 나선 사람들

한국언론의 선거보도는 거대정당 대표주자들과 1,2등 후보의 동정,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악습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선거를 통해서도 대중의 이해관계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소수의 목소리가 무시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이념적 좌표가 약간 좌클릭했다고 하지만, 진보언론조차 통합진보당의 대표주자들을 소개하는 선에서 관심이 끝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에 <단비뉴스>는 기성언론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하는 작은 정당이면서도 우리사회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주장들, 특히 청년들의 소외된 목소리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단비뉴스>는 선거의 주체가 정치인과 미디어가 아니라 유권자임을 명심하겠습니다. (편집자).

나를 대변할 정당보다 내가 만들어가는 정당

“정치가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이고 정치를 바로잡아야 우리 삶의 근원들이 해소된다.”(김어준 <닥치고 정치>). 무릎을 탁 치고 마음먹는다. 내 삶의 변화를 위해 4월 11일 투표하자고. 더 나은 정치가 더 나은 삶을 만든다는데 뭔들 못하겠냐고.

하지만 이내 좌절한다. 여야 간 논쟁, 계파갈등, 공천경쟁은 내 삶과 무관하게 진행된다. 비정규직이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힘겨워해도, 청년들이 경쟁체제와 학교폭력으로 신음해도 눈 찔끔하는 정치인이 없다. 민주, 통합, 자유, 진보 등의 가치를 담은 당명이 등장하는데도 ‘나를 대변할 정당은 없다’며 좌절하고 포기하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런데 ‘내 당’을 당당히 말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내가 만든 정책’, ‘내가 참여하는 모임’이 당을 지탱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녹색당 선언>이란 책을 펴내고 실제로 녹색당을 건설했다. 서울, 경기, 부산, 대구, 충남에서 1,000명 이상 발기인을 확보해 설립요건을 충족한 녹색당은 ‘녹색’이라는 이념적 지향을 분명하게 담았다. 현 정부 임기 내내 4대강과 자전거 길에 뿌려진 녹색 시멘트에 질렸을 만도 한데, 이들의 ‘녹색’은 뭘 말하는가?

▲ 3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반핵아시아포럼(NNAF)에 참석한 녹색당과 아시아 시민운동가들이 한 목소리로 탈핵을 외치고 있다. ⓒ 녹색당

전화 인터뷰와 소셜 네트워크 대화창을 통해 ‘녹색당원’들을 만났다. 창당한 지 한 달 된 녹색당원들은 파릇파릇 생동하듯 거침없는 답변을 보내왔다.

녹색당원 김수민(31)씨는 고향인 경북 구미의 시의원이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그는 최근 “내가 만든 당에 내가 못 들어가리. 입당이 아니라 창당이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녹색당 창당에 팔 걷고 나섰다. “기존 당은 중앙에서 철저히 만들어지고 당 전체를 위해 지역조직이 떠받쳐지는 성격이 강했죠. 근데 녹색당은 거꾸로예요. 지역별 정당이 강하고 관심사의 연합에 따라서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당원 개개인이 당 안에서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이 대단히 높아요.”

대학시절 기존 진보정당에서 활동하며 사회·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던 그가 녹색당에 참여한 이유가 궁금했다.

“녹색당에서는 녹색이 깃든 의제들, 요컨대 탈핵, 탈토건, 여성, 청소년 문제 등을 수평적으로 제기하고 논쟁을 붙여요. 명망가나 이론가들의 입김이 거센 기존 정당과 다른 부분이죠. 별다른 압박감 없이 자신이 관심 있던 주제부터 시작해 다양한 연결고리를 만들어나갈 수 있어요. 그게 제가 하고 싶었던 정치예요. 여기서 함께 꾸는 꿈은 실현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 구미시의원 김수민씨는 지난해 10월부터 녹색당 창당을 준비했다. ⓒ 김수민

부연해서 설명하면 이런 방식이다.

“채식 모임이 있는데 그분들은 채식을 거듭할수록 단순한 식습관 문제 차원에서 끝날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셨대요. 농업이나 산업화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슈로 자연스레 뻗어나가는 거죠.”

지역 풀뿌리 세력의 연합체

좀 더 자세한 정책방향과 당원 간 의사소통 방식을 듣고자, 녹색당에서 정책을 담당하는 이보아(35)씨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이보아 씨로부터 기존 정당에서 쓰는 권위적인 용어부터 바로 쓰라는 답신이 왔다. ‘중앙당’은 ‘전국당’, ‘사무총장’은 ‘사무처장’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변화와 새로움은 좋지만 생소한 이에게 좀 너그러울 수 없냐는 ‘엄살’에 그가 답했다. 그의 대답은 녹색당이 세상과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중앙당이 아니라 전국당이라 하는 건, 녹색당이 지역 풀뿌리 세력의 연합체라는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에요. 총선 이후에는 전국당 사무실과 연구소 등도 지역에 두자는 이야기가 굉장한 공감대를 이루고 있어요. 당원대회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지역에서 하고. 당헌과 강령도 몇몇 학자나 전문가가 쓰지 않았어요. 당원들이 자발적으로 위원회를 꾸렸고 위원회에 직함을 내걸지 않은 평당원도 참여해 문구 하나하나 쉽게 직접 쓰려고 노력했어요. 총선 이후에는 전당원이 완전히 풀뿌리 토론으로 전면 개정을 하기로 당헌에 규정해 놓았어요.”

이른바 생활정치다. 선거철만 다가오면 기존 정치집단이 내거는 ‘지역 민심 수렴’이나 ‘지역경제 활성화’와는 시작부터 다르다. 녹색당은 풀뿌리 정치가 관념적으로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며 ‘모든 정책에 지역의 목소리가 묻어나게끔’ 노력하고 있다. 녹색당이 말하는 지역에는 우리사회 모든 소외된 목소리가 집약돼 있다.

“평상시에는 소수자와 약자에게 권력을 내주지 않다가 선거 때만 되면 국회의원 자리 줄 테니까 참여하라고 하는 방식은 장식용에 불과해요. 일상적인 정치활동과 의사결정 과정에 청년과 여성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게 녹색당의 차이점이에요. 이삼십대 청년이 광역녹색당의 대표격인 운영위원장으로 10명이나 참가하고 있고, 집행부에도 많아요.”

그는 청년들도 실제 당의 일상 활동과 의사결정구조에서 함께 논쟁하면서 문제의식을 이끌어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청년 일자리’나 '주거문제’와 같은 의제만 제시하는 건 지속가능지도 않고 당사자들 목소리가 제한적으로 반영될 뿐이라는 생각에서다.

2030스타를 내세우는 정치는 무의미

“늘상 정치를 해야 돼요. 몇 백 페이지 실태조사와 정책자료집이 내 삶을 바꿀 수는 없어요. 실천과 생활의 기반이 같지 않은 2030스타를 내세우는 정치는 무의미하다고 봐요. 현장에서 실제로 부딪혀보지 않은 사람은 누군가를 대변하기 힘들다는 거죠. 녹색당이 스타를 싫어하는 건 잘나가는 사람을 혐오해서가 아니라 체험하지 않고서는 자기 요구가 담긴 정치를 할 수 없고 현실을 바꿀 힘도 얻지 못한다는 겁니다.”

녹색당은 이번 총선에 후보 다섯을 냈다. 핵발전소 문제가 불거진 지역구(부산 해운대기장을, 경북 영양·영덕·봉화·울진군) 후보 둘과 비례대표 세 명. 작년 10월 창당준비위원회를 꾸려 올 3월에 창당한 녹색당이 선거에 너무 급히 뛰어든 게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환경운동 명망가 위주의 출마 후보들 이력만해도 녹색당이 표방하는 풀뿌리 정치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생략된 당원민주주의는 없었다고 한다. 당원들의 직접 추천을 거쳤고 비례대표 순번은 당원 직선으로 결정했다. 순번을 정해놓고 찬반투표를 하거나 전략공천, 낙하산공천을 한 정당과는 판이했다. 14년간 탈핵과 에너지전환 운동을 펼친 현장운동가 출신 비례1번 이유진(37) 후보에게 물었다. 전화기로 들려오는 이유진 후보의 목소리는 지쳐있었다. 며칠 새 전국을 누빈 탓이었다. 하지만 전국의 시민과 만나 녹색당을 알리면서 느낀 흥분이 되살아난 듯 열정적인 어투로 답했다.

“급하게 시작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시기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후쿠시마 사고 1년 후 핵발전소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이 급증하고, 4대강, 강정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등 국가의 일방적인 정책집행이 계속 말썽이 되고 있잖아요. 과거 정치구도에서는 차선의 선택만 강요당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녹색당이 선명하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보다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는 게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봤어요. 이제는 찍을 정당이 생겼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거라 봐요.”

▲ 비례1번 이유진 후보가 동작구 성대골 도서관의 '절전과 재생에너지' 정기모임에 참석해 주민과 대화하고 있다. ⓒ 녹색당

그는 2012년이 한국이 ‘핵발전 없는 세상’으로 가는 출발점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차악’이 아니라 ‘최선’을 택할 수 있는 정치를 녹색당이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비례후보로 선출해준 7300명 당원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가장 무섭다고 말했다.

“제가 비례대표라고 해서 함부로 결정 내리고 당내 의견을 종합할 수 없어요. 정치공학이 아니라 가치에 좌우되는 정당, 이게 우리 당의 취지거든요. 당원 분들이 선거운동을 하면서 다들 ‘내 당’ 이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질문도 많이 받아요. ‘녹색당은 어떤 사람들이 합니까?’ 제가 답하죠. ‘우리는 7300명이 합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몇 명이 당의 간판으로 나서는 한국 정치문화를 보여주는 거예요. 정당 존속 요건인 2%가 안 돼도 다시 부활할 거라고 믿어요.”

생태·환경뿐 아니라 양극화·노동문제도 대안 제시

14년간 시민사회에 몸담았던 그에게 정치는 생소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정치’로 방향을 선회한 이유가 분명했다.

“운동할 때는 들어주는 사람이 얼마 없어요. 당장 국회의원이 되려고 출마한 게 아니라 우리 세대가 이대로 가서는 미래가 없다는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나왔어요. 몸은 힘들고 마음도 힘들지만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여서 만든 당이니까요.”

녹색당은 종종 탈핵이나 탈토건 같은 생태·환경 분야에 국한된 의견을 표출하는 정당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녹색’이라는 가치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가 덜 알려진 탓이다. 녹색당은 사회양극화, 노동유연성, 청년·여성·장애인·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도 획기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요컨대 노동에 대한 녹색당의 관점은 이런 식이다. “덜 일해도, 덜 풍족해도 지속가능한 삶을 살자.” 지속가능한 발전과 경제성장이 아니라 ‘삶의 지속성’을 더 강조하는 녹색당은 여전히 경제성장률과 같은 수치를 언급하는 기존정당과 차별된다.

녹색당은 이번 선거에서 가장 급진적인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다. 그 실례가 30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발표한 ‘자치ㆍ환경ㆍ평화ㆍ에너지ㆍ미래세대 분야의 제주지역 5대 정책공약’이다. 공약에는 제주특별자치도의 특수성을 감안한 실질적 지역자치 실현와 환경과 평화의 섬으로서 제주를 지키자는 취지가 반영되어 있다.

“저희가 모든 지역에 특화된 정책을 발표할 수는 없지만. 제주에서 도민들이 생각하는 자치 정책을 독자적으로 내놨어요. 평가가 좋았습니다. 소수자들이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 부분을 저희가 계속 이야기해야죠.”

이유진 비례후보 말고도 취재에 응한 녹색당원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덕·울진 지역구에 출마한 박혜령(43) 후보는 “선거에 나서서 우리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은 사회운동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더구나 지난 3월, 정부와 한전의 일방적인 송전탑 건설 문제로 논란을 빚어왔던 밀양에 찾아간 탈핵 희망버스가 4월 7~8일 핵발전소 문제가 불거진 영덕에 찾아온다는 소식에 그는 한껏 기대를 걸었다.

“지역엔 관의 통제가 심해 주민들이 지역 문제를 외면하거나 적당히 넘어가려는 관성이 있어요. 하지만 이번 선거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면서 그분들도 고민이 많다는 사실을 느끼게 돼요. 그 목소리를 대변하고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반성합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그분들도 마음의 문을 조금 더 열어주실 거라 믿어요. 지역자치라는 이상은 지속적이고 지난한 과정을 통해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 영덕·울진 지역구 박혜령 후보와 비례 이유진 후보가 울진 북면 핵발전소 앞에 서 있다. ⓒ 녹색당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없는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으나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그것이 길이 되었다.’(루쉰 ‘고향’)

‘나를 대변할 정당’을 찾기보다 ‘내가 대변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정당’을 위하여 ‘길 없는 길’을 나선 사람들. 그들의 길은 어디쯤에서 끝나고 마는 걸까, 아니면 사람들이 즐겨 다니는 새 길을 기어코 만들어내고야 말 건가?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자초지종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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