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소희 기자
그는 좋은 아버지였다. 축 처진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형편이 어려운 아들 친구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며 손 내미는 사람이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회사를 일으켜 세운 좋은 경영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을 지키는 데 너무 몰두한 탓일까? 그는 원칙과 절차를 무시한 채 힘을 즐길 줄만 알았다. 말쑥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섰지만, 돌아서면 도시의 무법자로 변했다. 영화 <스파이더맨>의 악당, 고블린 이야기다.

재벌들 역시 한국의 좋은 아버지요, 기업인들이었다.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은 국토 위에 남은 것이라곤 없었다. 그들은 폐허 위에 공장을 세우고, 물건을 만들어 해외로 수출했다. 제조 경험은커녕 초보기술자조차 부족했던 조선·전자·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지 수십 년 만에 세계 1등으로 올라섰다. 1970년 254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이제는 2만 달러 수준으로 늘어난 배경에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분야에 과감하게 투자한 재벌들의 결단과  땀 흘려 일한 열정이 서려있다.

그러나 손 안에 든 부(富)를 놓지 않으려 한 점도 고블린과 비슷했다. 외자배정과 감세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은 국가, 밤잠을 줄여가며 일한 노동자들, 원가절감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 협력업체들의 노력이 부의 열매를 키운 밑거름이었음을 까맣게 잊은 모습이었다. '돈이 된다면!' 재벌들은 택배, 동네 슈퍼, 빵집, 문구용품점 등 가리지 않고 진출했고, 내부 일감을 몰아줘 계열사들을 키웠다.

대신, 오랜 시간 동네의 일상사가 벌어지는 공간이었고 풍경의 일부를 구성해온 동네가게들은 하나 둘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재벌들은 한편으로 '저비용 고효율'을 외치며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둘렀고, 비정규직 채용을 늘렸다. 장기고용과 시간이 필요한 연구개발, 시설분야의 투자 규모를 줄였다. 알뜰하게 살림한 결과 10대 기업의 자산 대비 보유자금 비율만 꾸준히 올라 2009년 1000%를 넘어섰다.

▲ 영화 <스파이더맨> 화면 캡처. ⓒ 콜롬비아 픽쳐스

밀려나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법과 제도마저 재벌 앞에 무기력했다. 10명 중 절반이 고위공무원, 판·검사 출신인 대기업 사외이사들은 '전관예우'를 무기로 기업 구하기에 앞장섰다. 그 덕분에 불법 비자금을 쌓거나 아들딸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려 '꼼수'를 쓴 회장님들의 죗값은 '집행유예 3년에 사회봉사명령'이 공식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니 아이들은 "돈이 최고다"라는 어른들의 푸념을 들으며 자랄 수밖에 없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권이 무시당하는 상황을 '무노조 경영신화'라 추앙받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회장님'만 꿈꾼다. 사회를 좌지우지할 막강한 힘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써온 한국 재벌이 만들어낸 ‘이상한 나라’의 현실이다. 이따금 장학재단을 출범하고, 겨울이면 달동네에 연탄을 배달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겉과 속이 다른 고블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영화 끝에 고블린은 죽는다. 하지만 그를 닮은 또 다른 고블린들이 계속 나타나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린다. 현실적 해법은 '고블린의 죽음'이 아니라 근본적 체질개선일 것이다. 스파이더맨처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하는 고블린이 등장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최근 주목받는 재벌개혁론의 핵심도 마찬가지다. 법과 원칙에 따라 기업을 운영하고, 합당한 세금을 내고, 협력업체와 공정거래를 하라는 요구는 힘의 달콤함만 알고 책임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여망이다. 그럼에도 '반기업 정서를 자극해 표심을 얻으려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고블린의 아집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재벌은 총선을 앞두고 왜 도마에 올랐는지, 스스로 고민하고 획기적인 체질개선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버티다 사라지면 또 다른 고블린이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이미 자기자신이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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