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는 보조수단…
발로 뛰며 바닥 민심 취재를

[시민편집인의 눈]

▲ 이봉수 저널리즘스쿨 원장

6·2 지방선거를 이변으로 비치게 하는 데 같이 기여한 언론들은 선거 뒤 민심을 해석하는 데는 두 그룹으로 나눠진다. 선거 때마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변은 실로 이변이 아니라 언론이 ‘만들어낸’ 가공의 현실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선거 뒤 진보언론은 정권이 민심의 명령에 복종해 획기적인 정책전환을 하라고 촉구한 반면, 보수정권에 영향력이 큰 보수언론은 흔들림 없이 국정에 임하라고 당부했다.

그래서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4일 방송연설에서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면서도 “역사의 큰 흐름에서 대한민국은 지금 바른 길로 가고 있다”며 “국정기조를 확고하게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선거가 무엇인가? 주요 국가정책을 선택하고 그 정책을 밀고 나갈 리더를 뽑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다. 지금 이대로 가면 ‘선거무용론’이 나올 판이다.

알다시피 민주주의와 언론은 동반자 관계다. 민주주의가 실천되지 않는 나라에 제대로 된 언론이 없고, 언론지형이 기형적인 나라에 민주주의 또한 파행적으로 운영된다. 보수와 진보, 양당 체제가 자리잡은 유럽의 민주주의 선진국에는 진정한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이 양립해 있다.

유럽에서라면 수구로 규정될 보수정당, 그리고 또다른 보수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우리나라 정당 체제는 보수 위주 언론계 판도를 반영한다. 민주당의 정치적 성향은 다양한 당원들만큼이나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들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영국의 보수신문 <더 타임스>의 기사를 참고할 필요는 있겠다. ‘그는 유럽 기준으로는 보수주의자였다.’

진보 쪽은 보수가 장악한 신문시장과 정권이 장악한 방송환경 탓만 할 게 아니다. 진보언론을 표방하는 <한겨레>조차 크게 보면 한나라/민주 양당 위주로 선거보도를 해왔다. 나름대로 좀 배려는 했지만, 진보정당의 공약이나 선거운동을 보도하는 데 대체로 인색했다고 본다. 이런 현실은 매체에 대한 접근권 차원에서 심각한 불균형과 민심의 왜곡을 초래한다. 영국·프랑스·독일 등의 공영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가디언><르몽드> 등 일류 신문들도 의견이 아닌 사실 전달에서는 가능하면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는 것과 대비된다.

우리 언론의 선거보도를 모니터링하다 보면 불균형은 양적·질적 측면에서 심각한 양상을 드러낸다. 여론조사 결과는 불균형 보도의 근거로 작용한다. 여론조사에서 뒤처지는 3위 이하 후보를 외면하는 보도태도에는 우리 언론의 지독한 상업주의와 안정 희구 의식이 깔려 있다.

 

민주주의는 여론정치라고 하지만, 여론조사에는 소수 목소리를 더욱 소수 의견으로 몰아가고 혁신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억누르는 독소가 들어 있다.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여론에 밀려 취소했던 갈릴레이의 억울함은 선거판에서 수없이 발생한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노회찬 후보에게 가해진 사퇴압력도 그와 그의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정권 심판’이라는 대의를 주장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진보정당 후보는 항상 ‘사퇴용’으로 출마하라는 얘기가 된다.

여론조사의 결함과 과도한 영향 때문에 <비비시>(BBC)의 경우 아예 선거보도 준칙에 여론조사 결과는 기사를 쓸 때 참고로만 활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목으로 뽑아 ‘누가 우세하다’는 식의 보도를 삼가도록 한다. 인간은 자기 의견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이의 생각을 알아내려 하고 언론보도로 부각된 ‘밴드왜건’을 따라가는 투표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시민편집인실로 온 전화나 이메일 중에는<한겨레>조차 ‘오세훈 확실’이라는 여론조사의 덫에 걸려 치열한 서울시장 경쟁을 소홀히 다뤘다는 항의가 많았다. 그러나 <한겨레>는 반성 대신 서울시장 선거 패배 원인을 한명숙 후보와 민주당에만 돌리는 칼럼을 내보냈다.(4일, 아침햇발, ‘김상곤과 한명숙’)

언론이 한나라당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한 근거 중 하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여론조사에서 고공행진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유사한 질문에도 응답 결과가 달리 나타날 수 있는 여론조사의 딜레마를 언론이 간과한 탓이다. 미국 갤럽 편집장 프랭크 뉴포트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하는 방식에 관한 글에서 ‘상반하는 결과의 딜레마’에 빠진 사례를 든다. 클린턴의 직무수행에 대한 지지율은 탄핵 위기 중에도 60%대를 유지했다.

앞으로 계속될 선거에서 여론조사의 함정에 쉽게 빠지지 않으려면 여론조사를 보조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바닥 민심을 발로 뛰어다니며 취재하는 수밖에 없다. 정치인을 만나기에도 바쁜 정치부에만 맡겨둘 게 아니라 수백명의 기자를 두고 있는 편집국이 힘을 모아야 할 일이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투표율이 높아질 것 같은 예감은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 트위터 등으로 선거 참여를 권유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고, 예전에는 귀찮은 일로만 치부하던 부재자투표 신고까지 알뜰히 챙기는 학생들을 보며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론은 ‘계층투표’와 ‘세대투표’를 갑작스런 양상으로 분석했지만, 기자들만 몰랐을 뿐 청년들은 이미 양극화와 청년실업, 환경훼손 문제 등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투표로 의견을 표출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겨레>가 선거에서 확인된 민의를 바탕으로 4대강 사업 중단 등 주요 의제들을 더 끈질기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쉽다. 정부·여당은 세종시 수정안 부결로 민의를 수용한다는 모양새를 갖추려는 듯한데, 세종시는 사실 선거 이전에 이미 추진 동력을 상실한 것이었다. 세종시 수정안은 이른바 ‘건설족’의 이해관계가 4대강 사업만큼 절실하게 걸려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정운찬 총리, 지금이 떠날 때다’라는 사설(5일)이 시의적절한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대통령제 아래서 국무총리에게 국정 전반의 책임을 묻는 것은 난센스다. 대통령 책임만 희석시킨다. 여당에서 “대통령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인사쇄신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대통령(마음)만 바뀌면 된다”고 대꾸한 강기갑 의원이 핵심을 찔렀다.

인사쇄신에 무게를 두는 시각은 ‘천안함 사고, 군 문책인사 단행’(15일)이라는 기사와 제목에도 은연중 드러나는 듯하다. ‘단행’은 ‘결단하여 실행한다’는 뜻인데, 면직이나 군법회의 회부가 아니라 전역지원서를 받는 게 ‘결단’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다. <경향>과 <한국>은 가치중립적인 ‘내정’이라는 용어를 썼다.

선거 후 야당의 반성을 촉구하는 기사였던 직설이 ‘놈현 관장사’라는 용어 선택의 문제로 논란에 휩싸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외부 압력에 편집이 함부로 흔들려서도 안 되지만, 그렇게까지 표현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문제는 남는다. 용어가 너무 부각됨으로써 직설의 좋은 시도와 두 논객이 던지고자 했던 의제들은 오히려 묻혀버렸다. “그놈의 헌법”이나 “깽판” 같은 노무현 대통령의 직설이 보수세력에 어떤 빌미를 주었던가를 연상해보라.

편집국장의 사과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한국 언론은 사과하는 데 훨씬 더 익숙해지고 관대해져야 한다고 본다. 명백한 잘못이 있는데도 언론중재위로, 법원으로 끝까지 끌고 가서야 지면에 보일 듯 말 듯 조그맣게 사과하는 풍토는 사라져야 한다. <뉴욕 타임스>나 <가디언> 같은 일류신문들이 정정란을 상설하고, 독자의 항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오해 소지가 있었다’며 일단 신속하게 사과부터 하는 것은 자칫 흉기가 될 수 있는 언론의 오만함을 스스로 경계하기 위한 조처일 것이다.

시민편집인실에 쇄도한 전화들도 직설의 취지와 논조에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균형과 예의를 촉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DJ 유훈통치’라는 나름대로 조심스런 표현과 ‘쥐를 잡겠다고 나섰다’는 표현 사이에 불균형을 지적한 이도 있었다. 신중한 용어 선택과 사과는 언론의 굴복이 아니다. 독자의 정서, 곧 민심을 읽는 것이다.

이봉수/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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