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나]

 ▲ 안수찬(한겨레21 사회팀장)
“가만, 저게 뭐지?”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나를 픽업한 교민은 일순 긴장했다. 그는 백미러를 자꾸 쳐다봤다. 흰색 밴에는 너댓명의 흑인이 타고 있었다. 민방위 훈련도 아니고, 실제 상황이라고? 나는 조금 전까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요즘, 소웨토에서 하루 서너명씩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정말요? 그런 뉴스는 못 봤는데….” “남아공 언론이 그걸 모두 보도하진 않으니까요.”

요하네스버그 근처 흑인 거주지역인 소웨토는 이틀 뒤, 내가 방문할 곳이었다. 그런 곳을 가야된단 말인가. 현지 가이드는 과연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급기야 흑인 강도가 내 목에 정글용 칼을 대고 소니 캠코더 앞에 서서 “돈을 보내라”고 줄루어로 외치는 장면까지 상상한 순간, 교민이 말했던 것이다. “왜 따라오지?”

공항에서 나오는 차를 뒤따라와 숙소 바로 앞에서 모든 짐을 털어간다는 남아공의 강도 이야기를 나도 들었다. 그들은 교차로에 멈춰선 차의 유리창을 깨는 용맹함을 갖췄고, 사람의 얼굴에 비닐백을 뒤집어 씌운 뒤 뜨거운 물을 부어 금고 문을 열게 하는 지략까지 겸비했다고 네티즌들은 여러 블로그와 미니홈피에서 경고한 바 있다. 인터넷에 나도는 그런 이야기는 마치 백두산 천지에 공룡이 산다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였는데, 도대체 그런 글을 읽고 실제로 백두산에 올라 천지 공룡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흰색 밴의 5인조가 강도인지는 아닌지는 영영 알아낼 수 없게 됐다. “잠시 돌아가죠.” 교민은 숙소로 가다 말고 샛길로 빠졌다. 뒤따르던 흰색 밴은 그대로 가던 길을 갔다. 그들이 근거 없는 혐의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건실한 한국 교민이 18시간을 날아온 한국인 기자를 공연히 겁줄 이유는 없었을 터. 지난 5월 중순, 10여 일 동안의 남아공 현지 취재의 첫 순간부터 나는 시차 적응 말고 치안 적응부터 해야 했다. 

“정부와 국가의 모든 기관은 공화국 인민의 좋은 삶(well-being)을 공고히 하며, 헌법과 공화국과 그 인민에게 충성한다.” 한국의 개헌 문제를 취재하다 남아공 헌법을 읽은 적이 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남아공 헌법은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체계적이다. 특히 “정부는… 인민에게 충성한다”는 대목은 감동적이다. 참고로 한국 헌법에는 ‘국가의 의무’ 대신 ‘국민의 의무’만 규정하고 있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인종·정파를 넘어 국민적 합의 아래 새 헌법을 만든 남아공은 현대 민주주의의 첨단에 해당하는 가치를 그들의 최고 법전에 담았다. 예컨대 어린이 인권에 대한 조항만 십여 개에 이른다. 흑백 내전의 위기 직전에 서로 무기를 내리고 대화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미래 국가의 기초와 정치권력의 분점을 논의한 일련의 과정을 떠올리며, 그들의 약속이자 다짐이었던 헌법 조문들을 나는 전율하며 읽었다. 

불행하게도 남아공 땅에서 사람을 전율시키는 것은 헌법이 아니었다. 가방은 땅에 내려놓지 마라. 들고 가라는 이야기다. 카메라를 차에 두지 마라. 유리창 깨고 훔쳐간다. 자동차를 외딴 곳에 주차하지 마라. 차 부품을 분해해 들고 간다. 강도를 만나면 그냥 줘라. 그들은 진짜 찌르고 쏜다…. 
 
▲ 요하네스버그 인근 흑인 밀집 거주지역인 ‘소웨토’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여사는 골목. ⓒ 한겨레21 자료사진


며칠을 보낸 뒤에야 현지 교민들이 당부한 이야기의 실체를 짐작하게 됐다. 남아공 흑인들은 노점을 많이 한다. 과일·빵·잡화를 내다 판다. 그들은 구걸도 한다. 도심 교차로마다 걸인들이 차창 밖에서 손을 내민다. 그들은 그냥 누워 자기도 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면 도로 옆 잔디에서 뙤약볕을 받으며 흐느적거리는 흑인들을 계속 만난다. 그들은 가난했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 사람들도 가난하잖아요?” 여러 아프리카 나라를 다녀본 현지 교민에게 물어봤다.

“물론이죠. 대신 남아공에는 부자들이 있죠.” 남아공 4900만 인구 가운데 2%가 국내 소비의 20%를 차지한다. 소득 상위계층 10%가 국내 총수입의 50%를 벌어들이는 동안, 하위 20%는 1.5%만 번다. 실업률은 20~30%에 이르는데, 흑인의 절반 이상은 실업자다. 

“저 땅에서 농사라도 지으면 좋을 텐데.”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를 보며 내가 물었다. “전부 백인 땅이거든요.” 남아공 국토의 70%를 인구의 0.01%에 해당하는 백인 6만여 명이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 땅은 대부분 농업용지가 아니다. 남아공은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와 금의 생산지다. 19세기 후반부터 백인들은 곳곳에 광산을 개발했다. 한 세기가 넘도록 남아공 흑인들은 광산에서 일했다. 

그러니까 남아공 흑인들의 유전자는 지난 100여 년 동안 ‘도시화’된 것이다. 도시에 들어와 백인에게 고용된 광부로 살거나,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에 기대는 노점을 하는 방식으로 100여년을 살았던 것이다. 그것은 진화이자 퇴화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에도 광산을 비롯한 경제권력의 대부분은 여전히 백인 수중에 있다. 남아공 흑인들은 토지, 농사, 소유를 희구하는 유전자를 잃어버린 듯 했다. 다른 도리 없이 그저 가난한데 바로 곁에 무궁무진한 부가 있다면, 그 귀결은 범죄일 수밖에 없다. 가난이 아니라 빈부격차가 범죄의 이유였다. 

남아공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정치 민주주의와 경제 민주주의의 극심한 불일치였다. 소웨토에 가면 남아공 헌법 조문을 새겨 넣은 기념탑이 있다. 그 옆 가난한 골목에는 작은 민둥산을 이룬 맥주병들이 쌓여 있었다. “술값이 엄청 싸서 흑인 상당수가 알코올 중독자”라고 현지 가이드가 말했다. 남아공의 사회경제체제는 부의 분배를 허락하지 않고, 빈부 격차의 현실을 망각하는 일만 허용하고 있었다. 

얼마 전 작성한 기사에 ‘대놓고’ 쓰진 못했지만, 나는 그 풍경을 보며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마음 깊이 반대하게 되었다. 가난한 이에게도 축제는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멀쩡한 럭비 경기장 바로 옆에 새로 축구장을 만드는 데만 1조4800억 원을 쏟아 붓는 정부라면 축제를 주최할 자격은 재론되어야 한다. 그 돈은 마땅히 가난한 이의 일상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 남아공 ANC 정부는 한 달의 축제를 위해 한 세대의 분배문제를 통째로 유보해버렸다. 

고대 이래 축제는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마련하는 질펀한 잔치였다. FIFA와 그 스폰서 기업은 이번 월드컵에서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대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이 정말 축제라면, 남아공의 가난한 흑인들은 이 축제에서 무엇을 먹고 마시며 즐길 것인가. 범죄는, 아니 외국인의 지갑에 담긴 부의 한 조각이나마 얻으려고 공항에서부터 밴을 타고 한 시간여를 추적하다 허탕치는 일은 남아공 흑인들이 이 잔칫상의 한 귀퉁이에 걸터앉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렇다고 그게 옳은 일은 아닐 터이니, 그러게 애시당초 이런 축제를 왜 열었느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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