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주상돈

▲ 주상돈 기자
노숙인에게 혹한의 겨울은 지옥이다. 날씨가 생사를 결정하는 원시 수준의 삶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질병이 많은 여름과 함께 겨울에 사망률이 두 정점을 이루는 ‘노숙인 사망률 통계’가 계절에 따라 더 고달픈 노숙인의 삶을 보여준다. 내 한 몸 누일 방바닥조차 없는 노숙인들은 우리사회의 대표적 ‘소외계층’이다. 찬 바닥에 내몰린 책임을 겉으로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으로 거칠게 표출하지만 속으로는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 스스로도 무전유죄의 통념에 빠져있다. 

최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노숙인 203명을 심층면접한 ‘경제인으로서의 노숙인 연구’보고서를 보면 그들의 절반가량은 노숙인이 된 이유를 ‘내 탓’이라 생각한다. ‘사회와 내 책임이 반반이다’라고 응답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70%가 넘는다.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산다는 부끄러움은 어쩌면 최소한의 염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생 열심히 일했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누가 부끄러워해야 하나?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시베리아가 된 듯한 이번 겨울에도 노숙인을 지나쳐가는 사람은 물론이고 동전 한푼 던지는 사람들 중에서도 스스로 책임의식을 느끼는 이가 몇이나 될까?

가난에 대한 죄의식의 뿌리는 돈에 대한 찬양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가난해 보이는 김밥할머니는 조금도 존경하지 않다가 평생 김밥을 말아 번 큰돈을 기부할 때는 놀라움과 함께 ‘반짝’ 존경을 표한다. 사람들은 묵묵히 평생 김밥을 만든 노동 그 자체, 힘들게 모은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할머니의 기부행위보다 돈의 액수를 존경하는지도 모른다. 노동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벌거벗은 모습이 아닌가?

돈을 동경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고 재벌에서 88만원 세대까지 ‘각자도생’이 지상과제다. 연평균 근로시간이 OECD 1위지만 일을 나누지 않고, 출산율이 OECD 꼴찌라며 호들갑을 떨고도 부하가 육아휴직을 신청하면 눈치를 주고, 옆자리 친구가 학교폭력으로 멍들어도 손을 내밀지 않는 곳이 바로 우리의 경쟁지상주의 사회다.

우리 탓만은 아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니까. 우리도 약자를 보살펴주거나 책을 덮고 옆자리 친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은데 못하는 거니까. 하지만 우리가 바꿀 수 있다. 1%가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은 99%의 각성과 단합에서 나오니까.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