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준석

▲ 이준석 기자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서명된 미국 독립선언서는 토머스 제퍼슨과 벤저민 프랭클린이 공동으로 작성했다. 서두에서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살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 등을 명시했다. 정부가 이런 권리를 추구하는 데서 멀어진다면 국민은 새로운 정부를 세울 권한을 갖는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세상은 선언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카페에서 프랭클린을 만난 한 변호사가 말했다. “이 세상은 온통 불의와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징벌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당신들이 작성한 선언서에는 그 같은 선언을 제대로 지키는 데 필요한 사법적, 군사적 제재를 가할 권한이 없습니다.” 프랭클린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 선언서 뒤에는 막강하고 영원한 권력이 버티고 있습니다. 바로 수치심의 권력이죠.”

프랭클린이 순진했던 걸까? 오늘날 한국에서는 수치심을 느껴야 할 권력자들이 뻔뻔한 반면, 당당해야 할 서민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27일 사퇴하면서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며 자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고 했다. 불법행위는 역사에 맡길 게 아니라 사법절차에 맡겨야 하는 것 아닌가? 박희태 국회의장과 이상득 의원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별로 없다. 하기야 이명박 대통령조차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 했으니 수치심 자체가 없는 사람들인가?

권력자뿐 아니라 재력가들도 회삿돈을 횡령하고 골목상권까지 진출해 종업원과 서민들 몫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1% 재력가들은 그들의 재력이 99%의 노동과 헌신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안다면, 서민들의 마지막 생계와 희망까지 뺏어가는 데 대해 최소한의 ‘수치심’은 느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서민들은 열등감과 무력감에 수치심을 안고 1% 앞에서 위축된다. 프랭클린의 바람대로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보며 함께 고통을 느끼고 부끄러워했더라면 1 대 99의 구조가 고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정의가 바로 선다. 1,500억 자산을 기부한 안철수씨도 청년들을 위한 강연에서 맨 먼저 하는 말이 ‘미안하다’이다. 기성세대로서 부끄럽다는 것이다. 부자세, 일명 버핏세를 주장한 워렌 버핏은 회사 직원이 내는 세금보다 더 적게 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치심의 권력이 힘을 낸 것이다.

서민들은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수치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치심의 그늘 아래 있는 대다수 서민들은 당당하지 못했다.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에 적응하려고만 했다. 오히려 자신이 부지런하지 못한 죄, 노력하지 못한 죄라 여기며 부끄러워했다. 이제 이들이 광장에 모였다. 수치심을 무릅쓰고 거리에 나와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중동의 봄이 유럽과 미국의 가을로 이어지며 전 세계 서민들이 뭉치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수치심은 인간의 불명예에서 나온다. 그는 ‘인간의 명예’에 반하거나 치욕스럽게 만드는 태도나 상황, 행동이나 의도에 항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정의가 뿌리 내리는 토양이 마련되는 것이다. 99% 서민들은 스스로를 치욕스럽게 만드는 이 사회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이제 1%의 권력자와 재력가들이 답해야 한다.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얻은 성과를 몇몇이 독식하는 불명예스러운 상황에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하다. ‘수치심의 권력’이 힘차게 발동되는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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