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최원석

▲ 최원석 기자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남루한 차림 속에 자신을 감추고 ‘일’에 집중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암행어사 출두요’하고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때는 지방 수령들의 비리를 다 파악한 뒤 벌을 줄 시점, 혹은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는 순간이었다. 지난 19일 일종의 ‘민정시찰’을 나간 곳에서 긴급전화 119를 걸었다가 자신에게 불친절하게 응대한 소방관 두 명을 인사조치 당하게 만든 김문수 경기도지사와는 많이 달랐다는 얘기다.   

김 지사는 경기도 남양주의 한 노인요양원에 갔다가 암환자 이송체계를 문의하기 위해 남양주소방서에 119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인터넷에 공개된 녹음 파일을 들어보면 김 지사는 먼저 “나 도지사 김문숩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화 받은 소방관이 ‘도지사’라는데 대해 별다른 반응 없이 “무슨 일이시냐”고 하자 ‘도지사 김문수’임을 거듭 강조하며 상대의 이름을 물었다. 소방관은 이름을 대지 않은 채 용건을 말하라고 재촉하다 장난 전화라고 생각한 듯 전화를 끊었다. 김 지사는 다시 전화를 걸어 다른 소방관에게도 ‘도지사 김문수’임을 밝히고 조금 전 근무자의 이름을 물었다. 두 번째 소방관 역시 “이 전화는 비상전화다. 무슨 일 때문에 전화 했는지 이야기 하라”고 말했고, 김 지사는 “도지사가 누구냐고 묻는데 대답을 안 하느냐”고 언짢아하다 결국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경기도 소방재난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화 응대교육을 하라”고 질책했다고 한다. 두 소방관은 지난 23일 각각 포천과 가평소방서로 전보됐고 징계도 예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방재청 통계에 따르면 2010년 한 해 동안 온갖 내용으로 걸려온 119신고전화가 1300만 건이 넘었고, 이중 명백한 장난전화만 해도 2만 3천 건이나 됐다. 상황실 근무자들은 쏟아지는 전화들 속에서 정말 긴급한 신고를 가려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여기에 누군가 전화를 걸어 자신의 직위를 내세우며 전화 받는 사람 이름이 뭔지 물어본다면 근무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도지사 김문수’ 운운하며 용건은 말하지 않고 거듭 근무자의 이름을 물으니, 소방관들로선 ‘거기 중국집이죠’ 따위의 전화로 생각하기 쉬웠을 것이다.

한 네티즌은 “상황판에 전화를 건 위치가 뜰 텐데, 노인요양원에서 누군가 119를 걸어 자꾸 ‘나 도지사요’ 했다면 소방관들로서는 장난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 지사가 소방관들의 태도에 기분이 나빴다 하더라도 자신이 전화한 이유를 바로 설명했다면 오해는 풀렸을 것이다. 부족한 인원으로 밤샘 교대 근무를 하는 소방관들에게 ‘감정노동자의 친절’까지 기대한 김 지사에게 더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닐까. 

물론 119 상황실 근무자가 전화 내용을 진지하게 파악하지 않고 섣불리 장난으로 단정한 것은 문제가 있다. 문제가 된 두 소방관은 ‘근무 매뉴얼(수칙)’을 어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얼마든지 행정적으로 알아 볼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긴급 상황용 119로 전화를 걸어 권위적으로 대화를 시도한 김 지사에게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 열악한 여건에서 일하는 119 대원들을 격려하진 못할망정, 시비를 걸어 징계를 받도록 만드는 게 지사가 할 일인가. 

경기도는 소방항공대의 운항횟수가 514건으로, 강원도의 563건에 이어 가장 많다고 한다. 경기도에 배정되어 있는 헬기는 3대인데, 김 지사는 2006년부터 올해 6월까지 총 93회에 걸쳐 이 소방용 헬기들을 탔다고 한다. 1200만 도민을 위해 써야 할 소방용 헬기를 자가용처럼 이용한 김 지사는 ‘근무 매뉴얼’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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