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동현

▲ 김동현 기자
학생 대부분이 정부 공직자인 KDI 정책대학원 재학 시절, 한국 경제발전과 새마을운동의 관계를 주제로 한 수업시간이었다. 나는 호기심에 새마을운동과 북한의 ‘천리마운동’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질문했다. 교수는 자기 전공이 아니라면서 답변을 피했고, 갑자기 강의실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정말 차이점을 알고 논점을 분명히 하고 싶어 한 질문이었지만, 이후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좌빨’로 규정됐다. 보수의 가치를 존중하는 내가 ‘좌빨’로 불린 경위이다. 

2년 전, 일본 와세다대 유학생이던 나는 북한전문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북한은 오륙십년대까지만 해도, 동독과 함께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특히 전후복구사업으로 펼친 1차 5개년계획과 1957년부터 시작된 ‘천리마운동’으로 연평균 성장률 20% 내외를 달성했다. 비록 중공업 우선정책으로 이후, 농•공업간의 만성적 불균형 구조에 시달리게 되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업기반을 그토록 빠른 시일 내에 회복했다는 점, 60년대에 들어와서야 시작된 한국의 ‘경제개발5개년계획’보다 10여년 빨랐다는 점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빠져있던 나에게 새롭기만 했다.

일본인 교수는, 북한사회를 움직인 원동력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민생단 사건’을 예로 들며, 북한 주민들이 그를 신격화하는 데는 강압적인 세뇌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이 있으며,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완성된 ‘주체 사상’은 북한 대내외 정책의 근간으로 자리잡게 됐다고 설명했다.

민생단 사건은 공산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 다루지 않는 남한의 ‘한국 근현대사’에는 생소한 것이다. 일제가 조선-중공 항일 게릴라 연대를 분쇄하기 위해, 조선인 첩자가 잠복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을 계기로 중공군은 조선 출신 게릴라들을 철저히 숙청했는데, 당시 김일성도 연루되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 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조선족 고아들을 거둬들이는데, 그들은 이후 그의 친위대로 활약하며 북한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이 된다. 그들 후손은 지금도 북한사회의 엘리트로 자리잡고 있다. 북한사회에서 김일성의 존재가 ‘어버이 수령’으로 모셔지는 데는 이러한 역사적 공감이 있었다.  

또, 타국에 의존하지 말고 자력 갱생하자는 주체사상의 이면에는 김일성이 중공군에게 당했던 배신이 한몫을 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냉전시대 북한이 장기로 삼았던 ‘친소-친중’ 사다리 외교의 근간이 된다. ‘김일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북한사회의 심층분석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김정은 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와 전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3대 세습을 지적하며 정통성 없는 북한체제가 곧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사람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도하는 군중이 모두 동원됐다고 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물론 경제정책 실패와 독재 등으로 북한에도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다. 또 강제수용소에서 자행되고 있는 만행과 연평도 포격 등 대남도발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증오심은 그런 체제가 왜 그토록 오래 유지되는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방해한다. 남한에서 북한 관련 지식 습득은 여전히 매우 제한적이다.

언젠가 동독 총리 에리히 호네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인상적인 것은 그 다큐가 통일 되기 전 서독의 방송국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동독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열린 토론은 독일 통일의 토대가 되었다. 이제 남한에서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공과를 제대로 다룬 다큐멘터리가 나올 때가 됐다고 본다. 남북한 역사학자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도 대중 앞에 실체가 던져지면 바로잡힐 수 있다. 대중은 그렇게 어리석은 집단이 아니라고 보기에 그들에게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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