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1000번 수요집회

20년 외침에도 대답 없는 일본정부

14일 오전 11시반 서울시 종로구 중학동 18-11번지 일본대사관 앞.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강일출, 김순옥, 박옥선,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는 오늘도 닫힌 문 앞에 섰다. 과거 잘못을 사죄하고 피해자에게 배상하라고 외쳤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정부의 사과와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연 ‘수요집회’는 이날로 1000회를 채웠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1992년 1월 8일 시작한 '수요집회'가 14일로 1000회를 맞이했다. ⓒ 정혜아

1000번째 수요집회를 기념해 모인 3천여명(경찰 추산 1천명)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는 “서로 화합하고 힘을 모아 남북통일을 이뤄서 전쟁 없는 나라, 우리 아들딸이 마음껏 꽃 피우며 살아가는 나라가 되길 빈다”며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정부에 ‘과거 잘못을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배상하라’고 엄중하게 말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일본대사관을 향해 크게 외쳤다.

“일본대사는 정부에 고하라! 이 늙은이 죽기 전에 하루 빨리 사죄하라고. 알겠는가, 대사!”

김복동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관계자 등은 지난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당시 집회를 취소하고, 지난 3월 동일본 대지진 때 항의집회를 추모집회로 대신했을 때 말고는 수요일 낮 12시면 항상 거리에 나섰다. 20년이 흐르는 동안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234명에서 63명으로 줄었다.

집회 진행을 맡은 배우 권해효씨는 “오늘이 기쁜 날인지, 슬픈 날인지, 답답한 날인지 모르겠지만, 이 길에서 20년을 보내신 할머니들을 위해 모인 이 자리가 뜨겁다는 것은 확실하다”며 “오늘은 1000회를 기념할 뿐 아니라 할머니들 소원대로 ‘더 이상 수요집회가 없도록’ 연대하고 결의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 '수요집회' 1000회 기념행사를 지켜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집회가 계속된 20년간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234명에서 63명으로 줄었다. ⓒ 정혜아

윤미향 정대협 공동대표도 “오늘 이 자리는 완성도, 끝도 아니며 그만큼 가야 할 길이 멀고, 해야 할 일이 많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여러분과 옆 사람들이 손잡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전국 9개 지역 30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1인 시위와 집회가 열리고 있고, 일본 미국 독일 등 8개 나라 42개 도시에서 국제연대활동이 진행 중”이라고 소개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반영하듯 이날 집회에는 영국 로이터통신, 일본 엔에이치케이(NHK)방송 등 외신과 일본인, 캐나다인 등 외국인들도 참석해 눈에 띄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친구한테 이야기를 듣고 집회에 참석해왔다는 캐나다 출신 칼리텡(29‧영어교사)씨는 “할머니들의 강한 모습에 매우 감명받았다”며 “그들을 위해서도 정의가 바로 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 “예전에 일본 도쿄를 방문했을 때 야스쿠니 신사에서 전쟁범죄자를 기념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일본 정부는 자꾸 과거를 지우려고만 한다”고 지적했다.

이름을 밝히길 꺼려한 중년 남성(58‧작곡가)도 “독일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 등에 대해 유태인은 물론 전 세계 앞에 무릎 꿇고 사죄했다”며 “일본은 최소한 독일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냐”고 비판했다. 또 그는 “이것은 싸움이 아니라 올바른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수요집회에 의미를 부여했다.

시민들이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정부와 정치권도 힘을 모아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현 정부 들어 개인 대 일본정부 문제로 후퇴”

친구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한 고등학생 강혜원(19)양은 “지난 997회 때 반 전체가 왔는데, 그때는 참여인원이 50~100명 정도였고 ‘사죄하라’는 구호만 외치고 끝났다”며 “오늘은 사람도 많고, 행사도 많은데 어쩐지 씁쓸하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주은(19), 박다정양은 “정치색을 띈 오늘 집회는 조금 불편하다”며 정몽준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지지발언 때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는 등 “무조건 특정 정당을 매도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9살, 11살짜리 두 아들과 함께 집회를 지켜보던 한 교사(43)도 “이 문제는 초당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민주당의 문제, 민노당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또 “위안부 문제는 사실 정부끼리 맞대응해야 할 일인데, 현 정부 들어 개인 대 일본정부의 문제로 되돌아갔다”며 “우리 정부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수요집회를 찾은 정치인들 중 한명숙 민주당 상임고문은 “1000회 집회가 있기까지 해결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정치권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와 이부영 한일협정 재협상 국민행동 상임대표도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자, 원폭 피해자 문제 등을 포함하지 않은 문제가 근본 원인이라며 정치권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20년간 집회할 때마다 굳게 닫혀 있던 일본대사관 문은 이날도 어김없이 열리지 않았다. 모든 창문도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다. ⓒ 정혜아

이날 집회에서는 위안부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평화비 제막식이 있었다. 당초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양국 외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평화비 건립에 우려를 표명했지만 참가자들은 거침없이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사죄,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역사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등 피해자들의 7가지 요구사항을 외치며 평화비를 덮고 있던 보라색 천을 잡아 당겼다.

이밖에 트위터, 페이스북 등 온라인에서 모금운동을 벌여 마련한 ‘희망승합차’ 전달식과 배우 김여진, 이지아, 정영주씨가 직접 쓴 기념시 낭독 등을 했고, 윤미향 정대협 대표 등이 ‘제1000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성명서’를 발표하며 수요집회를 마무리했다. 2시간여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일본대사관 철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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