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지자체발 민원성 공약 채택 관행 벗어나야

다음 달 9일 치러질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은 주요 국정에 관한 정책 공약 외에도 지역 표심을 모으려 지역별 공약을 따로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주요 정당 후보들이 내놓은 지역 공약은 철도 건설 같은 대형 사회간접자본, 즉 SOC 사업에 치중된 데다 구체적인 내용도 비슷했다. 지방자치단체가 자기들이 원하는 개발 공약들을 각 정당에 건의하면, 각 후보 캠프들이 정밀한 검토 없이 그럴듯한 것들을 진짜 공약으로 채택해버리는 관행 때문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약속이라도 한 듯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을 충청 지역 최우선 공약으로 제시하고 나머지 공약도 거의 비슷한 것은 이 때문이다. 후보별로 공약 변별력도 없고, 지역마다 개발 공약을 쏟아내니 당선된들 확실히 지킨다는 보장도 없는 선물 꾸러미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공약 선정에 지역 주민 참여를 보장하고, 채택하는 공약은 이행 책임을 높이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20대 대선 원내 4당 후보. 후보들의 지역 공약은 대체로 큰 차이가 없어 ‘변별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이재명·심상정 후보 캠프, 윤석열·안철수 후보는 연합뉴스

너도나도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 후보의 충북지역 주요 공약은 청주시 도심을 통과하는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이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지난 12일 충북 청주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충북지역 7대 공약을 발표하며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을 1번 공약으로 제시했고,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지난달 22일 청주를 방문해 충북 7대 공약 가운데 1번 공약으로 내세웠다. 충청북도와 남도 경계를 넘어 충청권 내부 주요 도시를 연결해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오갈 수 있게 하는 대중교통 구축이 충청권 메가시티 구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충청권 광역철도는 대전과 청주공항을 잇는 전철이다. 대전 지하철 1호선 종점인 반석역에서 철도를 연장해 세종시를 지나 기차역인 오송역까지 이어지고, 오송역에서 청주 도심을 지하로 통과해 청주공항까지 통하는 51킬로미터 길이 노선이다. 충북선도 오송역과 청주공항을 연결하지만 청주 도심은 통과하지는 않는다. 충청권 광역철도는 지난해 충청지역 지자체장들이 정부에 추진을 건의했지만 제4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에 최종적으로 반영되지 못했다.

▲ 광역철도 필요성을 설명한 온라인 홍보물. 충청권 안에 있는 여러 도시를 연결해 수도권처럼 광역 생활권을 만들겠다고 나와 있다. ⓒ 청주시

양당 후보의 공약이 같은 건 이뿐만이 아니다. 강원-호남선(강호축) 완성, 충남 서산시에서 경북 울진군을 잇는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설치, 청주공항 활주로 재포장과 여객청사 확충, 괴산-제천 고속도로 건설, 2차전지와 바이오산업 육성, 충주호(청풍호)와 백두대간 중심 휴양관광벨트 추진 등 7개 공약이 같았다. 이 후보는 인공지능(AI) 영재고등학교 설립과 도심 가까이에 있는 청주교도소 이전을, 윤 후보는 물질의 미세구조를 분석할 때 쓰이는 방사광가속기 산업 육성을 제시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오송생명과학단지의 백신 연구 지원, 에너지자립형 청주시청 신청사 건립으로 지역에서 친환경 정책 실현, 청주시와 음성군 LNG발전소 건설 계획 백지화,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가 간행된 청주 흥덕사 완전 복원 등 네 가지를 공약으로 발표했다. 심 후보도 지난해 12월 청주를 방문한 자리에서는 광역철도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아직 지역 공약을 확정 짓지는 않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광역철도 건설을 가장 앞세웠다. 2차전지와 바이오산업 육성, 휴양관광벨트 조성 등의 공약도 이재명, 윤석열 후보와 똑같이 제시했다. 광역철도 건설에는 주요 네 후보 의견이 일치한 셈이다. 

판박이 공약 만드는 지자체 민원성 공약

후보마다 공약이 거의 같은 이유는 충청북도가 공약화해 달라고 건의한 내용을 정당들이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충청북도는 지난달 14일, 12개 과제를 담은 35쪽짜리 지역 공약 건의문을 발표하고 정당들에 전달했다. 충북도가 지난해 6월부터 검토해 작성한 내용이었다. 충북도가 건의한 12개 공약 가운데 스마트농업 전진기지 육성과 수소산업 클러스터 조성, 정수장 신설을 포함한 충주댐 광역상수도 사업 등 일부만 채택되지 않았다. 

이재명, 윤석열 후보 사이 겹치지 않은 공약인 인공지능 영재고 설립과 청주교도소 이전, 방사광가속기 산업 육성도 모두 충북도가 건의한 공약이다. 두 후보가 충북도 건의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으로 검토해 내세운 공약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 충북 지역 공약 건의문 일부.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홈페이지에 건의문 원문이 공개돼 있다. ⓒ 충청북도

이 후보가 바이오산업을 육성하겠다며 세부 과제로 언급한 ‘제천 천연물 향 산업 인공지능 융합기술센터 구축’도 건의문에 제시된 사업이다. 국비 700억 원 등을 포함한 1천억 원을 투입해 2027년까지 제천시 제2 산업단지에 식물성 화학물질인 천연물에서 추출한 향기를 연구하고 제품화하는 시설을 만든다는 내용이다. 이미 대중에 익숙한 다른 공약들과 달리 이 후보의 유세 발언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지난해부터 천연물 향 클러스터 조성사업을 추진한 제천시 담당자는 “제천은 바이오산업 가운데 한방분야를 특화산업으로 육성했다가 천연물 분야로 확장해 가는 과도기에 있다”며 “지자체가 선점한 사업에 정부 지원을 촉구하려는 차원에서 공약화를 건의했다”고 말했다.

지자체가 대선 후보들에게 공약을 건의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대통령 선거 때마다 전국 시·도가 원하는 공약을 후보 캠프에 몰래 갖다줬다”며 “18대 대선 때부터 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주도해 이 관행을 양성화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자체가 지방정부 대 중앙정부로서 공개적으로 건의해야 정당이 어떤 공약을 선별해 수용하는지 유권자가 평가할 수 있다”며 “음성적인 거래에서 양성적인 협약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 지난달 14일 국회세종의사당에서 충북지사, 충남지사, 세종시장, 대전시장 등 충청권 4개 광역 지자체장이 대선 후보들에게 건의할 공약을 발표했다. ⓒ 충청북도

이미 발표한 공약들… 소요 예산은 “계산 중”

지자체가 공약을 음성적으로 건의하는 행태는 근절됐지만 문제는 여전하다. 건의된 공약은 대폭 수용하면서도,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 대다수인 지역 공약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예산 규모를 후보들이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충북도는 12개 과제를 건의하면서 56개 세부 사업을 모두 추진하려면 41조 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주요 정당들이 충북지역 1번 공약으로 제시한 충청권 광역철도 조성에만 3조 5천억 원이 필요할 것으로 봤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지난 16일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 제출한 답변서를 통해 270여 개 국정 공약 이행에는 5년 동안 300조 원이 필요하다고 밝히면서도, 후보를 배출한 경기도를 제외하고 전국 17개 지자체에서 수용한 122개 공약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예산은 명시하지 않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국정 공약 이행에는 266조 원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119개 지역 공약 이행에 필요한 재원은 추계 중이라고만 답했다.

같은 질문지에 정의당은 국정 공약에 120조 원, 지역 공약에 55조 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국민의당은 국정 공약에는 206조 원이 필요하며, 지역 공약은 아직 확정 짓지 않아 재원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추산하고 있다고 답했다.

▲ 이재명 민주당 후보 측이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로 제출한 답변서 일부. 주요 후보 네 명 중 국정 공약 예산이 가장 크고, 지역 공약도 가장 많이 반영했지만 이행에 필요한 재원은 밝히지 않았다. ⓒ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SOC 사업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지역에 꼭 필요한 사업도 많다”면서 “문제는 한정된 예산을 어디에 먼저 쓸지 우선순위를 얘기하지 않으면 공약이 공수표가 된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지역 안에서 진행할 사업 사이 우선순위는 물론, 국가 전체 차원의 우선순위와 이행 기한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지역 공약도 국정 공약과 같은 링(경기장)에 올려놓고 우선순위를 겨뤄야 한다. 하지만 지역 공약 문제는 항상 별개의 링으로 취급돼 어느 공약이든 제한 없이 올려진다”며 “시·도당은 물론 중앙당에서조차 문제의식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는 선거 때마다 같은 공약이 반복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실제 충북지역 공약 가운데 강호축 철도 건설, 미호천국가생태휴양벨트 조성 등은 지난 2017년 19대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채택했지만 우선순위에 밀려 이행되지 않은 채 이번 대선에서 다시 공약으로 발표됐다.

“각계각층 참여해야 진정한 지역 공약”

주요 후보들이 지자체가 건의한 내용은 공약화하면서 정작 지역사회가 요구해온 공약은 비켜 간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선영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섞어놓으면 어느 정당 공약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변별력 없는 개발 일색 공약들은 지역주민이 아니라 지역 행정기관의 숙원사업”이라며 “지역 주민의 이해와 요구를 파악해보려는 노력은 했는지 묻고 싶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소각장이 밀집된 충북지역에는 나쁜 공기질이 문제가 돼 왔다”며 “화력발전소에 대한 ‘대기오염총량제’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많았는데 이런 공약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공약을 건의하고 받아들여진 사례도 있다. 민간연구소인 충북경제사회연구원과 대전시민단체연대회의, 행정수도완성시민연대 등 충청지역 주요 시민단체들은 ‘국가균형발전 충청권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달 26일 KBS충남방송총국 설립과 시멘트 업체에 환경오염 부담 세금을 물리는 시멘트 지역자원시설세 도입, 2단계 공공기관 지방 이전 등을 포함한 10대 공약을 후보들에게 채택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답변서를 통해 “KBS 총국 설립문제는 방송사 고유권한”으로 공약으로 선언하면 방송경영 개입이 될 수 있다며 다만 “현실화를 위해 적극 협력하겠다”라고 답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공약 채택을 약속했고,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답변 기한인 지난 18일까지 답변서를 회신하지 않았다. 시멘트 지역자원시설세 도입은 이 후보와 심 후보가 수용하겠다고 답했고, 안 후보는 “내용과 문제점에 대해 사전에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채택을) 보류”한다고 답했다. 2단계 공공기관 지방 이전은 답변 후보 모두 수용 의사를 밝혔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지자체만 지역 공약을 건의할 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등 지역사회 각 단위에서 공약을 공개적으로 건의하는 관행이 만들어져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또 “지자체가 지역 공약을 만들 때 지역주민 참여를 보장해 건의할 공약을 추려내고 공통된 의견을 도출하는 방법도 있다”며 “이렇게 해야 지역발전을 위해 합의된, 진정한 지역 공약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편집: 임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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