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을 이끄는 공감의 힘’

공정, 정의, 사랑... 이 아름다운 단어들이 제 뜻과 다르게 남용되는 시대라 많이 식상해졌지만, 아무리 많이 써도 훼손되지 않는 게 ‘공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이 '공감'을 열쇠말로 강연하고 있다. ⓒ 주상돈

최근 급변하는 일련의 사회 흐름을 보며 ‘공감’이란 단어를 실감한다는 ‘시골의사’ 박경철. 이 시대 청춘들의 멘토로 유명한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이 지난 25일 제천 세명대학교를 찾았다. <자기혁명을 이끄는 공감의 힘>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그를 보기 위해 학생들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포함해서 500여명이 모였다. 그동안 열린 세명대 ‘명사초청교양강좌’ 가운데 가장 많은 청중이 모이는 바람에 상당수는 바닥에 앉아야 했다. 박 원장은 그가 자란 시골 마을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많은 아이들 가슴 속에 얼음기둥이 자라고 있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나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 동네였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감각이 없었던 곳이죠.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논마지기가 적고 많음이 다르긴 했지만 그걸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어요. 어린 우리들 세계에서 힘의 균형은 단지 ‘주먹’으로 통할 때였습니다.”

어린 박경철은 고모가 오며 가며 한 줄 한 줄 불러줘 5살 때 뜻도 모르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다. 그 덕에 본보기로 동네 초등학교에 불려가 조회시간에 형•누나들 앞에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를 읊었다. 그의 48년 인생 첫 외부특강인 셈. 학교에 들어가서도 반장을 도맡을 정도로 활달한 유년을 보내던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이사가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 박 원장 강연을 듣기 위해 25일 세명대 학생과 제천시민들 500여명이 모였다. ⓒ 주상돈

순경인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전학 간 대구 제일의 부촌 학교는 순박한 시골 소년 눈에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다. 만화에서나 보던 야구부가 초등학교에 있는 걸 보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던 그가 첫날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꺼내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종전 학교에서는 양은도시락과 유리병에 담은 김치가 고작이었는데 옆 친구가 도시락 ‘가방’을 꺼낸 것이다. 그것도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둘에 하나는 도시락가방을 가져왔고 가방을 여니 파스텔 톤의 도시락통이, 또 그걸 여니 소시지가 나왔다. 박경철은 그때 소시지도, 도시락가방도 처음 봤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보는 순간 도시락과 김치 병 뚜껑을 닫고 가방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아마 처음으로 ‘차이’을 느꼈던 것 같아요. 나 같은 양은도시락을 가진 친구들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고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안 했지만, 안 느껴도 되는 차이를 느꼈어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 열등감이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열등감을 느꼈죠. 자존심이 강했나 봐요. 그 전까지 안보이던 내 말표 운동화와 친구의 로봇 태권브이 운동화가 비교되면서, 주눅 들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얼마 뒤 선생님의 학부모 소환이 있었다. 순경 복장 그대로 온 아버지에게 선생님이 꺼낸 말은 반 육성회 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전학 온 뒤 지켜봤지만 친구들에게 먼저 말 거는 것도 못 봤고 너무 내성적이어서 종전 학교에 전화까지 해봤다는 거였다.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대답에 고심하던 선생님이 내린 결론은 ‘환경의 차이’였고, 박 원장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아버지에게 육성회 이사를 권유한 것이다.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에게 이사를 맡으라니 펄쩍 뛸 일”이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어린 박경철은 애가 탔다. ‘아버지가 왜 안 하시려고 하지, 안 하시면 어떡하지.’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학교 지원금이나 육성회비를 안내도 내고, 회의도 없다”며 “남들 시선이 뭐 대수라고, 자식을 위해 못할 일이 뭔가”라고 강권했다. 아버지가 9급 공무원 신분에 육성회 이사를 맡은 사연이었다. 

“구름 위를 나는 듯한 기분에 주인집 대문을 ‘뻥’ 차고 들어갔어요. 주인집 아주머니가 마침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어 자랑을 했더니, 악의는 없지만 거침없이 말하는 경상도 아주머니가 “똥파리가 무슨 육성회 이사를 하냐”는 거에요. 그 순간 달걀껍질로 보호받고 있던 제 유년기가 끝나고 세상을 만났죠. 왜 아버지가 육성회 이사를 안 맡으려 했는지, 왜 그걸 무작정 좋아할 일이 아닌지, 난 1초 만에 다 느꼈습니다. 그때 결심했어요. ‘공부 열심히 해서 1등으로 졸업해야겠다’, ‘성공해서 세 들어 사는 이 집을 사버려야겠다’. 물론 둘 다 못했지만…”

 ▲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 박 원장의 강연에 관객들은 웃거나 숙연해지며 공감을 표했다. ⓒ 주상돈

박 원장은 자신의 유년기가 끝나던 그 시점에 심리학 방어기제인 ‘승화’ 반응이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트라우마가 주어졌을 때, 인생에서 쓰러졌을 때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고 그걸 잡고 일어나면 인간은 좌절하지 않지만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고 내가 쓰러진 것을 아무도 모를 때 인간은 좌절한다. 70명 학생 중 한 명, 말단 공무원의 아들이 말수가 적다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고 이전 생활태도를 조사하고 ‘얘가 왜 이럴까’ 고민했던 선생님이 내민 손길, 그 ‘승화’로 어린 박경철은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신창원 씨가 탈주 후 잡혀서 ‘왜 이렇게 죄를 저지르냐’라고 물었을 때 ‘육성회비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슬리퍼로 뺨을 맞았고 그 이후 내 가슴속에 악마를 키우기 시작했다’더군요. 저는 가족이나 선생님의 손을 잡고 일어날 수 있었지만, 신창원 씨는 엄마가 도망간데다 아빠가 술만 먹으면 때리고 학교에 공책 하나 갖고 가기 힘든데 선생님한테 뺨을 맞은 거죠. 내밀어주는 손은 고사하고 일어나려는 손도 뿌리쳤어요. 이렇게 가슴 속에 얼음 기둥을 키우는 아이들이 우리나라에 100만이나 있다고 해요. 학교와 사회에서 손을 내밀어 조손가정, 결손가정 아이들이 역경을 이기고 사회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함께 걷는 ‘위드 미’의 손을 내밀자

박 원장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격리수용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독서질환’을 앓고 있는 그는 중학교 이후 고등학교 때까지 책을 과하게 읽었다고 한다. 공자 말씀에 ’배우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學而不思則罔),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고 했던가. 박경철은 사춘기 시절 다독으로 잔뜩 배우기는 했지만 그 지식의 근원을 고민하지 않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지혜가 부족했다고 한다.

대입 학력고사 원서 쓸 때쯤 진학 문제로 아버지와 상의했다. 이과였지만 법대나 국문과에 지원하고 싶었다. 당시 교차지원하면 100점 중에 15점을 빼야 했기 때문에 학교를 낮추면 갈 수 있는 상황. 한 시간 설득 끝에 아버지는 한 가지 당부만 남기고 이해해줬다.

“삶은 두 가지가 있더라. 화려하지만 가을바람에 날리는 낙엽 같은 인생, 잡초처럼 살아도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인생. 나는 옳고 그름의 판단과 상관없이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직업을 가져,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할 얘기는 다 했다.”

부모는 자기가 어떠하든 자식은 훌륭하게 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에 위선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박 원장은 자기 인생의 가장 고민스럽고 불안했던 모습을 이야기해준 아버지와 마음의 친구가 됐다고 한다. 사람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옳고 그름의 판단 차이가 없을 거란 생각으로 박경철은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 박 원장 이야기에 집중하는 청중들. ⓒ 주상돈

진학 후 레지던트로 일하던 어느 날, 비번인데도 밤을 샌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져 수술이나 치료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응급실로 실려왔다. 이제 생이 얼마 안 남은 아버지가 가족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누워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 아버지로서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를 짐작해 이틀 내내 끊임없이 말하고 아버지를 떠나 보냈다.

“병원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봐왔어요. 20분 간격으로 사람이 떠나는 것을 보기도 했고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무엇이 간절할 것 같습니까? 그게 누구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그 순간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입니다. 나를 사랑한 사람의 체온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나누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마지막 바람입니다. 우리는 그 귀한 체온과 사랑하는 이의 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살죠.”

외과 1년차에 만난 40대 여성 위암환자와 그 자식들은 박 원장에게 여러모로 기억에 남았다. 온 몸에 암이 전이돼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의사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회진 때마다 괴로웠단다. 환자 곁을 늘 지키는 교복 입은 오누이가 안쓰러워, 회진 돌고 레지턴트들이 라면 먹을 때 아이들을 불러 함께 먹었다. 의국에 상비식품처럼 쌓여있는 컵라면을 하나 더 뜯으면 되는 터라 특별한 선의도 아니었다. 박 원장이 아버지 여읠 때와 처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해 무심코 몇 마디 하기도 했다.

“나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주 힘들었는데 내가 그러면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견딜 만하더라. 네가 뚜벅뚜벅 네 인생을 살아가야 어머니가 안심하지 않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고 임종이 임박했을 때 자리를 지키던 박 원장은 의사들이 의례 떠올리는 그림을 상상하고 있었다. 사망 순간 아이들이 환자 옆에서 종알종알 이야기를 하더니, 아들이 엄마를 안고 담담하게 ‘사랑해요’라고 한마디 했다. 박 원장 인생에서 가장 묵직하고도 진한 감동의 ‘사랑한다’는 말이었지만, 들이닥치는 환자들 속에 그 기억도 5분 만에 잊혀졌다.

몇 년이 지나 여동생을 결혼시키고 그 아이가 신부가 되어 박 원장을 찾아왔다. ‘엄마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말이 자기 오누이가 살아가는 10년의 중요한 지침이 됐다는 말을 했을 때 박 원장은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보인 하찮은 선의 하나가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듯,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던진 작은 악의 하나가 어떤 인생을 지옥으로 밀어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대구로 전학 왔을 때 생각이 났어요. 우리는 늘 영향력을 미치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향력의 크기만 생각하지, 그게 어떤 영향력인지 고민하지 않아요. 지금까지는 제일 잘 뛰는 사람이 깃발 들고 앞서 뛰면 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쫓아갔습니다. 이제는 ‘팔로우 미(follow me)’하면서 혼자 뛰어가기보다는 ‘위드 미(with me)’하며 손잡고 같이 나아가는 시대죠. ‘위드 미’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리더십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에서 옵니다.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새로운 시대 패러다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재능의 포도송이를 스펙으로 터뜨리지 말아야

 ▲ 박경철 원장의 주요 저서들.

우리는 우주의 일원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몇 가지 스펙으로 재능을 줄 세우기 때문에 영글어진 재능의 포도송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박 원장의 말에 많은 학생들이 공감했다. 한의학과 이정민(26)씨도 그 중 하나였다.

“우주의 중심이 더 채울 게 뭐 있겠어요. 단점을 줄이다 보면 장점은 스스로 늘어난다는 박경철 원장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제 포도는 어떤 모양과 향으로 영글어가고 있을까요?”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간호학과로 편입했다는 이연희(29)씨는 미래의 간호사로서 각오를 다졌다.

“나이에 비해 사회생활이나 경험이 적어 자신감이 없었는데 ‘승화’ 이야기에 오늘 많은 걸 깨달았어요. 저도 간호사가 됐을 때 박 원장님처럼 환자들에게 말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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