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PC’(정치적 올바름)

▲ 유재인 기자

한쪽 날개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연인과 대화하면서 종종 답답한 순간이 찾아왔다. 대개 정치나 페미니즘, 소수자, 능력주의 등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성장 업적을 대단하게 여겼다. 지나가며 함께 본 퀴어 퍼레이드 속 동성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고, 대학의 서열이 점점 더 공고해지는 것은 ‘당연하고 공정한 것’ 이라고 했다. 보수 일간지를 30년 넘게 읽고 있는 그의 가족을, 도무지 ‘진보적 감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내가 맞고, 그가 틀린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 차이로 자주 싸웠다. 나는 늘 그에게 내 생각을 강요했다. 책과 신문을 읽고 알게 된 것들을 정의, 평등, 공정과 같은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고 논리적으로 보이게 전달했다. 그래도 설득하지 못하면 화를 내거나 울거나 짜증을 냈다. 내가 늘 ‘옳고’ 당신은 ‘그르다’는 내 말과 행동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싸우지 않으려고 논쟁적인 주제를 피하려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또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아니라 이념으로 그를 판단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그의 꿈을 ‘전통적 여성관’과 ‘유교적 가족주의’로만 여겼다. 반려동물에게 ‘앉아’ ‘일어서’를 시키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군대식 상명하복 문화에 너무 빠져든 게 아닌가 걱정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우리 관계를 통해 그가 아니라 내 문제를 보게 됐다. 나에게 과도한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에서 비롯된 오만함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자성이었다.  

사회가 과학 말고는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떠오른 특정 의제에 관해 우리 사회에는 옳고 그름이 정해져 있다. 평등, 공정, 노동자, 환경, 여성과 같은 문제를 다룰 때 사람들은 ‘깨어 있는 시민’으로 보이기 위해, 비난받지 않기 위해 자청해서 ‘PC’라는 반향실(echo room)에 갇힌다. 반향실이 나쁜 것도, 이 문제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도 결코 틀린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다.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틀에 갇히면 대화는 불가능해지고, 갈등은 해결할 수 없다. 내 의견이 맞다고만 소리 지르면, 듣는 쪽에서도 화가 나 똑같이 대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 백래시가 만연한 이유다. 

▲ 이념 이전에 사람이 있다.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이념에 가려 사람을 못 보게 한다. ⓒ Pixabay

사상 이전에 사람을 봐야 한다. 나 역시 연인을 ‘보수주의자’라고 비난하던 과거를 반성하고, 왜 그가 보수 성향을 갖게 됐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맞벌이 부부인 부모님 아래 자란 나와 전업주부로 한평생을 산 어머니를 보고 자란 그. 인서울 4년제 대학을 나와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나와 2년제 전문대를 졸업하고 바로 일하기 시작한 그. 여전히 그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보수’와 ‘진보’로 규정지을 수 없는 차이가 우리 둘 사이에 많다는 건 알게 됐다. 이해가 아니라 인정하기로 했다. 연애가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하는 것처럼, 새도 좌우의 날개로 함께 난다. 어떤 날개도 다른 날개보다 우월하지 않다. 


한국이 극심한 갈등사회가 된 것은 자기만 이롭게 하려는 아전인수식 발상에 너무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좌우, 여야, 노사, 세대, 계층, 지역, 환경 등 서로 간 갈등 국면에는 대개 인간, 특히 강자나 기득권층의 자기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간이 넓어져야 할 때입니다. 그런 생각과 풍자가 떠오르는 이는 누구나 글을 보내주세요. 첨삭하고 때로는 내 생각을 보태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봉수 교수)

편집 : 심미영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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