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충북 영동에 문 연 평화공원, ‘전쟁 참상’ 교육장으로

전쟁은 인간의 합리성과 상식, 동정심 따위를 순식간에 파탄 낸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26일, 미군의 대전 방어선이 밀리면서 피난길에 나섰던 충북 영동군 주곡리와 임계리 마을 주민 600여 명이 그 대표적인 희생자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정오, 미군의 인도에 따라 노근리 개근철교(쌍굴다리) 위에서 잠시 쉬던 피난민들은 갑자기 나타난 두 대의 미군 전투기가 폭격을 시작하자 혼비백산했다. 그들이 배수로와 쌍굴다리 안으로 앞 다퉈 피신하자 이번엔 미군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나중에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에 따르면 당시 작전 지휘부는 “미군 방어선을 벗어나는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사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미군은 이후 사흘 밤낮 동안 쌍굴 다리를 향해 기관총을 걸어 놓고 굴다리에서 나오는 피난민을 쏘았다. 7월 29일, 미군이 철수한 노근리에 도착한 인민군은 다리 부근을 뒤덮은 시신 300여 구와 마주쳤다.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간 영혼들의 한이 풀리길...”

이 참담한 사건은 1994년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란 소설이 나오기 전까지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당시 27살로, 어린 딸을 잃고 아내마저 중상을 입었던 정은용씨(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가 수십 년 한을 피눈물로 고발하면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9년 에이피(AP) 통신이 유족 증언 등을 생생히 담은 현장 탐사보도로 이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리면서 한미 양국 정치인들도 관심을 갖게 됐다. 2001년 클린턴 미 대통령의 유감 성명 발표에 이어 2004년에는 국내에서 희생자 유족 지원 및 위령사업 추진 등을 골자로 하는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통과됐다.

 

▲노근리 평화공원의 상징 위령탑 '평화, 화합, 추모의 비'. 매년 합동위령제가 이 곳에서 열릴 예정이다. ⓒ 임종헌

이후 6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지난 10월 27일 드디어 노근리 평화공원이 사건 현장 바로 옆 13만여m² 대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준공식에 앞서 열린 합동위령제에서 정은용 위원장은 “피로 얼룩진 사건 현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간 영혼들의 한을 풀고, 유족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숙원을 이루는 전환점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공원에 들어서면 평화기념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기념관에는 노근리 평화연구소 사무실과 함께 전시 공간이 배치됐다. 지하 1층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면 당시 사건에 대한 설명 자료와 생존자 증언 영상, 사건 현장 전시도 등을 볼 수 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바로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시청각효과를 잘 살렸다. 예를 들어 쌍굴다리 형태로 만들어진 통로에 들어서면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기관총 소리가 울려 퍼진다. 별 생각 없이 들어섰던 관람객도 사건 당시 피난민들의 공포를 떠올리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평화기념관 내부 모습. 사건 현장을 재현한 통로(왼쪽), 노근리 사건 생존자와 미군 증언 영상(오른쪽 위), 평화기념관 지하 1층(오른쪽 아래). ⓒ 임종헌

계단을 통해 1층으로 올라가면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유족들의 노력과 언론보도, 정치권 반응 등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사건 발생 직후 현장을 취재해서 “사망자만 400 명에 이른다”고 쓴 1950년 8월 19일자 ‘조선인민보’ 기사도 볼 수 있다. 노근리 사건을 세계에 알린 AP통신의 최상훈, 찰스 헨리, 마샤 맨도자 기자는 2000년 퓰리처상(탐사보도 부문)을 받았다.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차재영 교수는 한국언론정보학회보에 실린 논문에서 이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비극에 대한 특종 보도를 외국 언론사에 뺏긴 한국 언론의 나태와 무능을 비판했다.
 

 

▲평화기념관 1층에서 노근리 사건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관람객. ⓒ 임종헌

 

 ▲노근리 평화공원 평화기념관 전경. ⓒ 임종헌

평화기념관을 나서면 조각공원과 위령탑을 만나게 된다. 높이 25m의 위령탑은 ‘평화, 화합, 추모의 비’라고 명명되었다. 이 위령탑 앞에서 매년 합동위령제가 열릴 예정이다. 조각공원에는 사건 당시의 참혹한 광경들을 소재로 ‘상처를 딛고 평화로 나아가자’는 메시지가 담긴 작품 9점이 전시되어 있다.

 

 ▲노근리 평화공원 조각공원에 전시된 작품들. ⓒ 임종헌

총알 박힌 사건 현장 위를 유유히 지나는 서울행 열차

노근리 사건 현장도 직접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59호로 지정된 쌍굴다리와 배수로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아직 총격 흔적이 선명한 다리 위로 경부선 열차가 지나간다. 페인트로 세모칠 해 둔 곳들을 자세히 바라보면 콘크리트 안에 박힌 총알을 볼 수 있다. 사건 직후 철로 옆에 매장한 유해들의 발굴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단비뉴스가 쌍굴다리 현장을 찾은 지난 13일, 임시로 마련된 위령비 앞에는 유족 한 명이 막 올리고 간 술병이 놓여있었다.

 

 ▲노근리 사건 현장 '쌍굴다리'와 그 위를 지나가는 서울행 열차. 사건 당시 미군이 쏜 기관총탄 흔적과 총알이 박힌 곳이 흰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 임종헌
 ▲사건 당시 미군이 쏜 총알(붉은색 원)이 콘크리트벽에 박혀있다. ⓒ 임종헌
 ▲희생자를 매장한 철로 옆 야산에 세워진 임시 위령비. 한 유족이 놓고 간 술잔이 놓여 있다. ⓒ 임종헌

공원 뒤쪽 언덕에 자리 잡은 희생자 합동묘역에는 166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유족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28명은 개인 묘지가 조성됐지만 나머지 138명은 남자, 여자, 아동으로 나뉘어 한 무덤 아래 묻혔다.

 

 ▲희생자 합동묘역 전경. ⓒ 임종헌

강의실, 숙소, 식당 등이 마련된 교육관과 노근리 사건 당시 공중 폭격을 했던 F-86F 전투기 등이 전시된 야외전시장은 미완성 상태다. 야외공연 무대와 쌍굴다리 뒤편 전망대까지 모든 시설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추가 예산이 필요하다. 노근리 평화공원을 위해 배정된 예산은 이미 바닥났기 때문에 영동군은 앞으로 민간사업자와 손을 잡고 남은 공사를 진행할 방침이다. 국내에서 처음 와인을 제조한 와인코리아(주)와 옹기 제작 체험장인 옹기공방을 묶는 역사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만드는 안이 검토되고 있다.

 

 ▲야외전시장 전경. 사건 당시 피난민들에게 폭탄을 떨군 F-86F 전투기와 군용차 두 대가 전시되어 있다. ⓒ 임종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평화공원 모습. 예산이 배정되는대로 물을 채우는 등 보완작업을 진행 할 계획이다. ⓒ 임종헌

아직 개장 초라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평화공원은 한산했다. 가족 단위 관람객 대여섯 팀만 눈에 띄었다. 기념관을 돌아본 관람객들은 잘 알지 못했던 노근리 사건의 참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화해설사 최향숙씨(42•여)는 “주말에는 하루 200명 정도가 찾는다”며 “국도로 이동하다가 잠깐 방문한 가족 관람객이 많다”고 밝혔다.

최씨는 “노근리 사건은 군대의 민간인 학살을 체계적으로 입증하고 사과까지 받아낸 중요한 사례”라며 “이 공원이 ‘평화 및 인권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근리 평화공원 최종 조감도. 인근 관광지와 연계해 '평화와 인권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 노근리사건 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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