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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의 날' 이름이 던지는 질문
[청년기자의 시선2] '축제' ④ 노동, 노동자
2021년 05월 27일 (목) 14:46:37 이예슬 기자 yeslowly@gmail.com

오월은 축제의 계절

5월만 되면 들떴다. 초등학생 시절, 5월은 한 달 내내 축제였다. 연두빛 나뭇잎들이 점점 짙어져 초록에 가까워지니 기분도 산뜻했다. 어린이날에는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라난다’는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학교 전체에 울려 퍼졌다. 평소 같았으면 복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셨을 호랑이 선생님도 온화한 미소를 보이셨다. 그날만은 우리가 주인공이었다.

어버이날을 위한 카네이션 접기도 했다. 빨강, 초록 색종이로 매년 다른 모양의 카네이션을 만들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정교한 카네이션이 됐다. 카네이션을 숨겨 놓았다가 어버이날 아침 부모님 가슴에 달아드리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오늘 내가 만든 카네이션 달고 출근하셨다!”며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 스승의날에는 모든 친구들이 함께 선생님 얼굴을 그려 선물로 드렸다. 어린 내게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까지 있는 5월은 ‘축제의 계절’이었다. © 연합뉴스

스승의날,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해드릴 궁리도 잊지 않았다. 친구들이 모여 담임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칠판 가득 선생님 얼굴을 그렸다. 수업 도중 갑자기 정전이 된 척 불을 끄고 케익을 들고 들어오며 ‘스승의 은혜’를 합창했다. 아이들의 작당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더 즐거웠다. 5월은 이벤트와 놀이로 바쁜, 행복한 축제의 계절이었다.

‘근로자의 날’ 명칭 유감

5월은 첫날부터 맘에 들었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이 5월 1일에는 회사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빨간 날도 아닌데 왜 쉬냐는 내 질문에, 아버지는 ‘근로자의 날’이고 일하는 어른들을 위한 날이라고 설명했다. 헷갈렸다. 부모님은 쉬는데 학교 선생님들은 쉬지 않았다. 이상했지만 별 생각은 없었다. 부모님이 집에서 하교하는 나를 맞이해 주는 게 그저 좋았다.

우리가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이라 부르는 근거는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이다. 법은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하고, 이 날을 근로기준법에 따른 유급휴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근로자의 날’은 정부가 정한 공식 명칭인 것이다. 근로자의 날이 노동절이라고도 불린다는 걸 안 건 중학생이 되어서였다.

‘근로자의 날’이란 명칭은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법적 한계를 드러낸다. 근로자의 날의 근거인 근로기준법이 적용대상을 차별적으로 한정해, 모든 노동자를 포함하지 못한다. 근로자의 날에는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이들만 쉬고, 유급휴일로 인정받는다. 몸을 쓰는 노동을 하는 같은 노동자지만, 누구는 쉬고 누구는 쉬지 못한다. 현재도 제한적이니 세상이 바뀌어 새롭게 등장한 노동을 포괄할 리도 없다. 학습지 교사나 골프장 캐디 등 특수고용노동자는 근로자가 아니다. 돌봄 도우미나 배달 기사 등 플랫폼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근로기준법이 말하는 ‘근로자’에는 월급을 꼬박꼬박 받는 이른바 ‘월급쟁이’들만 포함된다.

   
▲ ‘비정규직 이제 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은 노동절인 지난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직접고용', '노조 할 권리 보장' 등을 요구했다. 현재의 근로기준법은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 연합뉴스

공무원들은 ‘월급쟁이’이지만 근로자의 날에 쉴 수 없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5월 1일에 출근했던 이유다. 공무원은 ‘공무원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근로자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맞벌이 공무원 부부는 5월 1일이 되면 곤란하다. 어린이집이 휴원해, 아이를 돌보기 위해 둘 중 하나가 연차를 내야 한다.

‘근로’와 ‘노동’, 두 단어가 함축하는 프레임

‘근로자의 날’ 명칭에는 노동과 노동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우선 ‘근로’라는 단어에는 국가 통제적 요소가 강하다. 근로자의 날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는 노동절이었다. 1963년에 박정희 정권이 발의한 ‘근로자의 날 제정법안’으로 ‘노동절’은 ‘근로자의 날’로 바뀌었다. ‘공산 진영에서 이날을 정치적으로 역이용’한다는 이유였다. 이후 ‘근로자’들은 산업화의 역군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근로를 요구받았다.

‘근로’라는 단어에는 ‘누군가를 위해 성실히 일하는 행위’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종속적 관계를 강조하고, 자신보다 국가와 기업의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이런 관념이 ‘노동’이라는 가치와 ‘노동자’의 존재를 평가절하하고, 노동과 노동자를 천시하는 풍토를 조장했다는 점이다. 근로자는 스스로 몸을 쓰는 신성한 노동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는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는 근로자란 이름으로 그저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우리 사회에서 ‘근로’와 ‘노동’ 사이의 논쟁은 여전하다. 심지어 금기시까지 한다. 지난달 경북 구미시에서 행정조직 개편안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기존의 ‘경제기획국’을 ‘경제노동국’으로 개편하려는데, ‘노동’이라는 단어가 문제였다. 윤정호 국민의힘 의원은 “‘노동’은 힘들게 일하는 현장을 떠올리게 하고, 육체노동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공부를 하고 펜을 잡으며 ‘근로자’라는 명칭을 좋게 써 왔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신문식 열린민주당 의원이 “‘근로’는 부지런히 일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라는 말이 더 맞다”고 반박했지만, ‘경제노동국’은 결국 ‘경제지원국’이 되었다. 구미시 사례는 ‘노동’을 바라보는, 금기시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 지난달, 경북 구미시에서 시청 ‘경제기획국’을 ‘경제노동국’으로 변경하자는 의견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국민의힘 의원이 ‘노동’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보이며, 개편안은 경제지원국으로 결정났다. 구미시 사례는 오늘 우리 사회가 노동을 대하는 단면이자 상징이다. © 한겨레

노동계는 오랫동안 사용자에게 종속되는 개념의 ‘근로자’가 아니라 신성한 노동의 권리를 보장받는 독립된 주체로서 ‘노동자’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국회도 ‘근로자의 날’ 명칭을 ‘노동자의 날’로 바꾸고, 공무원의 휴무를 보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법안소위원회는 지난 24일 회의를 열고 근로자의 날 개정안을 논의했다.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의 날로 이름을 바꾸고, 공무원에게도 유급휴일을 부여하는 내용이다. 이수진 민주당 국회의원은 “‘근로(勤勞)’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되어 온 용어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부지런히 일함’으로 정의돼, 국가의 통제적 의미가 담긴 용어”라며, “근로를 ‘몸을 움직여 일을 함’으로 정의되는 ‘노동(勞動)’이라는 가치 중립적 의미를 담은 용어로 대체해야 한다”고 개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피 흘리며 쟁취한 노동자의 권리

노동절의 시작은 13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 미국의 노동자들은 하루에 12~16시간씩 휴일 없이 일하고 주급 7달러 정도를 받았다. 살인적인 노동과 저임금에 고통받던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8만 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파업집회를 벌였다.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미국 노동자들의 평화 시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무력진압에 나선 경찰이 발포했고, 어린 소녀를 포함한 노동자 6명이 사망했다. 파업 나흘째인 5월 4일, 격분한 노동자 30만 명은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으로 모였다.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평화 시위가 계속되다가, 경찰의 해산 명령에 누군가 폭탄을 던지면서 광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경찰은 폭동시위를 이유로 노동운동 지도자 8명을 재판에 넘겼고, 그 중 5명이 사형당했다. 이른바 ‘헤이마켓 사건’이다.

   
▲ 미국의 노동자들은 1886년 5월,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 모여 8시간 근로를 요구하며 파업 시위를 벌였다. 전 세계적으로 열리는 ‘메이데이(노동절)’는 헤이마켓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 wikimedia

미국 노동자 시위는 유럽 노동자를 움직였다. 헤이마켓 사건 3년 뒤인 1889년, 유럽 노동자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국제사회주의기구 ‘제2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인터내셔널은 헤이마켓 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고 8시간 노동쟁취를 선언하며 5월 1일을 ‘메이 데이(May Day)’로 지정했다. 이듬해인 1890년 5월 1일, 세계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며 제1회 노동절 대회를 열었다. 첫 공식행사였다. 그 뒤로 5월 1일은 국경을 넘어 세계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를 상징하는 날로 자리 잡았다. 이후로 세계노동운동의 중심에는 늘 메이 데이가 존재했다.

‘노동자’가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

올해로 세계 노동절은 131번째를 맞았다. 1886년 시카고 시위에서 한 노동자가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여가’를 요구하는 인간 선언을 발표한 지 135년이 흘렀다.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싸움은 지금도 이어진다. 8시간 근무, 주말 휴무, 병가 수당, 육아휴직 등 지금 누리는 노동조건은 모두 노동운동의 결과물이다. 표면적인 노동조건은 좋아졌지만, 현실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여전히 노동3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노동조합 결성률은 간신히 10%를 넘기고 있다. 미비한 법과 제도 아래 노동자는 여전히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코로나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더 늪에 빠뜨렸다. 최악의 고용위기와 실업률, 생계가 유지되지 않는 최저임금에 고통받는다. 부와 노동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 이른바 ‘K 양극화’다.

   
▲ 경영효율과 기업이윤이 우선인 세상에서 노동자의 권익은 뒷전이다. 위험은 외주화되고, 산업재해는 줄지 않는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고 노동자가 대접받는 세상은 여전히 요원하다. © 경향신문

노동을 천시하는 풍조도 여전하다. 배달 노동자에게 주민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음식 냄새가 나니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라고 요구한다. 경비원은 ‘내 돈으로 월급 받는 사람’이므로 욕설하고 허드렛일 시켜도 되는 존재다. 위험한 일은 하청 업체에 싼값으로 맡기고 안전 관리는 하지 않아도 된다. 안전 규제를 지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보다 규제를 어긴 뒤 벌금을 내는 것이 더 저렴하다. 회사와 사업주는 안전 관리에 힘쓸 필요가 없다. 노동자 김용균이, 이선호가 사망하는 이유다. 하루 평균 7명이 일하다 죽어가지만, ‘남의 일’이다. 여전히 경영효율과 기업이윤을 앞세운다.

   
▲ 지난 1일, 131주년 세계 노동절을 맞아 노동자들이 집회와 행진을 하며 고용안정과 불평등 해소를 요구했다. 헤이마켓 사건이 일어난 지 135년이 지나도 여전한 노동자의 외침은, 오늘 세상의 노동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 연합뉴스

노동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 요소다. 인간은 노동하며 진화했고, 현재의 문화와 문명을 이뤄냈다. 인간에게 노동은 본인과 가족의 생계 수단이자 자아실현의 도구이다. 노동은 신이 부여한 신성한 가치이고 노동자는 주체적인 인간이다. ‘노동절’이 여전히 ‘근로자의 날’인 오늘, 묻는다. 노동은 귀하고 노동자는 사람으로 대접받는가? 아니다. ‘노동’은 천박하고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기본권 확대와 생계가 가능한 최저임금을 요구 중이다. 노동절에 135년 전처럼 노동자의 피와 땀과 눈물이 흐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노동자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싸움 없이 얻어지는 권리는 없다. 축제의 달을 시작하는 5월 1일, 노동절을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고, ‘노동자’가 사람으로 대접받는 진짜 ‘축제’로 만들자.


[청년기자의 시선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선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축제’이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은 축제의 계절이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곳곳에서 벌어지던 다양한 행사들, 마음도 덩달아 부풀어 올랐었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춘 오늘, 돌아올, 아니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축제를 꿈꾼다. (편집자)

편집 : 유지인 기자

[이예슬 기자]
단비뉴스 편집기획팀장, 청년부 이예슬입니다.
천천히, 꾸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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