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축제' ➁ 인권

국수에서 발견한 축제의 의미

계절의 여왕 5월은 축제의 달이다. 결혼식이 줄을 잇는다. 주말 결혼식을 올린 지인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참석자를 50인으로 줄이기 위해 애를 먹었다. ‘선별된 50인’들은 사진사 앞에서 마스크로 보이지 않는 입꼬리 대신 웃음 어린 눈매를 만드느라 애를 썼다. 결혼식장엔 잔치국수가 나왔다. 국수는 누구나 잔치에 가서 한 그릇씩 뚝딱 해치우는 정 넘치는 우리나라 축제의 상징이다. 각설이도 그날만큼은 국수를 얻어 먹었다. 모두가 초대돼 함께 마음을 나누는 자리. 잔치국수를 먹어도 ‘선별된 50인’만이 참석한 결혼식장은 도무지 잔치 느낌이 나질 않았다. 

▲ 결혼식은 한 마을의 축제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잔치국수를 나눠 먹었다. 코로나19 이후명부에 작성된 사람들만 참석한 결혼식에서 먹는 잔치국수는 더 이상 화합과 축제의 음식이 아니다. Ⓒ SBS

축제란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불안과 시련,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한 의식으로, 놀이 형태로 치러졌다. 잔칫날만큼은 일에서 해방되어 규범을 일탈하는 것도 허용됐다. 신분과 성별이 무엇이든 어우러지는 장이었다. 맛있는 음식과 술을 나눠 먹고 어울려 춤추며 사회 전체가 하나가 되었다. 한가위나 설날, 대보름, 단오와 같은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고향 동네 어귀에 모여 탈놀이와 쥐불놀이, 강강술래 등을 하면서 화합을 다졌다. 축제는 제의이자 난장이었고, 무질서에서 ’새 질서’를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활력이었다.

진짜 축제에 당신을 초대한다

축제는 대개 '거래의 장'이었다. 산수유가 노랗게 피면 교정엔 대학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붙었다. 참여자들은 축제 현장을 돌아다니며 ‘우리는 모두 대학생’이라는 연대의식을 나눴다. 대학축제는 대학 동아리와 학과들이 주점을 열어 더 많이 팔아 이윤을 남기는 거래의 자리였다. 연대라는 것도 초대 가수들을 불러놓고 동시에 함성을 외쳐 댈 뿐이었다. 지역 축제도 거래의 장이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축제 현장에 진을 친 노점상들은 불량식품으로 어린 나를 유혹했다. 부모님들은 나를 위해 돈을 쓰는 손님이었을 뿐이다. 빙어 잡기 축제, 봄나물 축제 등 수많은 축제는 ‘소비 증진’, ‘지역경제 살리기’를 위해 열렸다. 축제에서 사람들은 ‘소비자’에 지나지 않았다.

2019년 런던에서 만난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는 달랐다. ‘참여의 장’인 축제였다. 퀴어 축제여서 처음에는 가도 될 것인가 망설였지만, 더 일찍 오지 못한 걸 후회할 정도였다. 축제를 즐기는 방식은 간단했다. 참여자가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꾸미곤 거리를 함께 걷는 것이 전부였다. 성 지향성이나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나’ 참여하고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에 무지개 색깔을 페인트칠한 사람들이 서로의 화려한 복장과 분장을 보고 감탄했다. 머리를 닭벼슬 같이 빳빳이 세워 무지개색으로 염색한 젊은이와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 커플이 어깨동무를 한 채 함께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축제는 성 소수자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즐기는 파티였다. 축제는 소수의 해방을 내세웠지만, 소수와 다수가 어우러져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어울림의 장이었다.

▲ 2019년 7월 6일 퀴어운동 런던 프라이드 퍼레이드 현장. 당시 50주년을 맞은 퍼레이드에 참가한 사람들은 LGBTQ의 상징인 무지개색을 활용해 자신만의 헤어 스타일, 의상, 분장을 하고 거리에 나왔다. 소수자 인권을 위한 축제였지만, 현장은 다수와 소수가 맥주를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경계를 허무는 어울림의 장이었다. Ⓒ 강주영

축제에선 누가 더 자신의 정체성을 뽐내는가가 관심이었다. 몸에 그린 페인팅의 독보성과 개성이 각광받는 현장. 나의 개성과 의견을 죽이고, 집단에 속하기를 요구받아온 한국인으로선 당혹스러웠다. 아시아계 레즈비언이 어깨에 둘러맸던 무지개 색 망토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무지개 보자기가 덮힌 등 위엔 붓글씨로 ‘아시아계 첫 번째 동성결혼 합법 국가’라고 적혀 있었다. 이 날로부터 두 달 전인 2019년 5월 24일, 대만은 법적으로 동성애자가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성소수자는 아시아에도 유럽에도 있었다. 당시 그는 LGBTQ 세계 안 또 하나의 소수로 용기를 내고 있었다.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국가와 국가, 인종과 인종, 성과 성, 사랑과 사랑의 평등이 한데 어우러지는 자리였다.

문화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문제는 지배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뚜렷한 구분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대로 현대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규정하고 집단과 집단으로 갈랐다. 그 안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20대 때 그저 ‘대학생’ 집단의 한 명으로 대학축제를 소비했던 나에게 퀴어 행진은 참여가 보장된 진정한 축제로 다가왔다. 런던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사람’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며 개개인이 자신만의 색을 뽑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색깔의 향연이었다.

뉴욕에서 가두 시위를 시작한 퀴어 운동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52주년을 맞았다. 코로나19로 작년엔 SNS와 비대면 기술을 활용해 행사가 열렸다. 축제는 거창하지 않다. 생각을 강요하는 거래의 장도 아니다. 그저 개개인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공유한다. 영국의 한 신문 기자는 퍼레이드에 참석한 남성 동성애자에게 '오늘날 각국에 축제처럼 번지는 이 퍼레이드를 파티라고 봐야 하느냐, 혁명운동이라고 봐야 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혁명이 즐겁지 않다면, 그건 그리 좋은 혁명은 아니겠죠?” 꼴 보기 싫다는 ‘그’를 축제에 초대하고 싶다. 혁명이 얼마나 즐거운 축제인지 발견할 좋은 자리이니!

(강주영 기자)

물어보기 전에

급한 일이 있어 을지로에서 명동으로 가는 길에 택시를 탔다. 5분 정도면 가는 길인데 명동역에 다 와서 차가 너무 막혔다. 하는 수 없이 택시에서 내려서 뛰다시피 걷다가, 길이 왜 막혔는지 알게 됐다. 명동역 앞, 왕복 4차선 차도에 형형색색의 사람들을 태운 트럭들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트럭마다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음악이 흘러나왔고, 차 위에, 도로에 있는 사람들은 반쯤 벗고 춤을 추고 있었다. 퀴어 퍼레이드였다. ‘왜 여기서 난리들이람’,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다시 걸었다.

퀴어 퍼레이드에 불편한 감정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도로 건너편 분수대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기 몸집만 한 십자가를 든 채 빨간 확성기에 대고 ‘동성애 반대’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한 부모는 신기한 듯 축제를 구경하는 아이의 눈을 가리고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찬송가와 유행가, 그리고 심심찮은 욕설과 고함이 뒤엉킨 명동 거리는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배척하는 사람들로 분리됐다. 

축제라고 했지만 축제가 아니었다. 협동도, 화합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축제에 참여하지 않은 성 다수자들은 성 소수자에게 눈으로, 확성기로, 마음으로 묻고 있었다. 왜 나의 길을 막냐고, 너무 선정적인 것이 아니냐고, 꼭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래야 하냐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이면서 생긴 언짢음, 무지에서 비롯된 불편함이 수많은 물음표가 되어 사람들 머리 위를 떠돌았다. 축제를 못마땅해하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는 글을 써왔던 내가 성 다수자들과 똑같은 눈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지난 2018년 7월 서울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축제 참가자들은 각자 무지개 깃발을 들고 흔들며 축제를 즐겼지만, 퀴어 문화 축제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 단체의 맞불 집회도 함께 열려 곳곳에서 충돌했다. Ⓒ KBS

나는 성 소수자가 아니다. 주변에는 성 소수자가 한 명도 없다. 여자 친구들에게는 남자친구, 이성 친구들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는지를 서슴없이 물어보며 지냈다. 관찰 예능에 나오는 남자 연예인의 특정한 행동을 보며 게이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하고, 여자인 친구들이 팔짱을 끼면 ‘레즈비언이라고 오해받는다’며 슬며시 팔짱을 풀기도 했다. 

몰랐기 때문이다. 사회 이슈나 현상을 몰라도 되고, 모르는 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내가 그 분야에 이미 권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정당하지 못한 폭력을 휘둘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성 소수자의 삶은 어떤지, 이들에게 퀴어 퍼레이드의 의미는 무엇인지, 혐오와 차별은 어디서 시작되는지 모른다. 무지에서 비롯된 불편함은 혐오와 차별을 낳고, 차별은 비수가 되어 이들의 심장에 꽂힌다. 차별금지법의 주체인 정치권의 소수자에 대한 혐오 시선도 여전하다. 지난 서울 시장 보궐선거에서 안철수 후보가 ‘성 소수자들의 권리만큼 일반인들의 거부할 권리도 중요하다’고 말한 게 대표적이다.

올해에만 정치인 김기홍이, 육군 하사 변희수가,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성 소수자들이 가슴에 비수를 맞고 죽었다. 성 소수자에게 묻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한다. 왜 이들은 길을 막으면서까지 자신을 내보이고 싶어 하는지, 왜 나는 저 모습을 선정적으로 느끼는지. 성 소수자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올해 퀴어 퍼레이드는 코로나19로 온라인으로 열린다. 축제가 없으니, 현장에서 나 같은 사람들이 내뱉던 크고 작은 혐오를 보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이 지금도 어둠 속에서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고 있는데.

(유재인 기자)

잠깐 드러났다 다시 사라지는 사람들

지난 3월 3일 아침 <경향신문>에서 ‘독일 첫 트랜스젠더 대대장’이라는 칼럼을 읽었다. 칼럼은 독일군 최초의 트랜스젠더 대대장 아나스타샤 비에팡을 소개했다. 아나스타샤는 마흔 살이던 2015년 상관에게 자신이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상관은 그의 성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수술을 받는 중에도, 수술을 받고 나서도 그는 군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필자인 이동미 작가는 칼럼을 마무리하며 “많은 성 소수자 군인들이 차별 없는 인권과 임무를 갖는 것, 나는 변 하사의 복직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라고 썼다. 봄이었다. 그날 아침 목련이 바람을 따라 위아래로 흔들릴 때 내 마음이 일렁였다.

몇 시간 후, 변희수 하사가 죽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가슴이 저렸다. 변 하사도 군 복무 중 성전환(성확정) 수술을 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군인이라는 직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랐다. 주변엔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지난해 1월, 얼굴과 실명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소속부대는 저의 결정을 지지하고 응원해줬다"며 "성전환 수술 이후에도 계속 복무를 저의 상급부대에 권유했다”라고 세상에 고마움을 표했다. 

거기까지였다. 군은 변희수 하사를 ‘심신장애 3급’으로 판단해 강제 전역을 결정했다. 심신장애가 있는 모든 사람이 군 복무를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군은 변희수 하사가 ‘고의로’ 자신의 장애를 유발했다고 판단했다. 유방암 때문에 유방절제 수술을 받았다고 ‘심신장애 2급’ 판정을 받아 군에서 쫓겨났던 피우진 당시 중령이, 소송에서 이겨 2년 후 군에 복직한 게 2008년이었다. 13년이 지났지만, 군은 바뀐 게 없었다. 

바뀌지 않은 것은 군대만이 아니다. 변희수 하사의 선택과 죽음을 보는 세상의 시선은 차갑다. 관련 기사에는 ‘자기가 여성을 선택한 것인 만큼 정당한 과정을 거쳐 여군으로 다시 입대하면 되지 않느냐’는 댓글이 달렸다. 현행법 체계에서 변희수 하사는 여군으로 입대할 수 없다. 여군 또한 성별 불일치를 겪으면 ‘장애’로 판단하고, 성 확정 수술을 하면 복무가 불가능한 5급 판정을 내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변희수 하사는 수술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한순간에 나라를 지키는 당당한 군인에서 ‘외계인’이 된 변 하사는, 결국 지난 3월 3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채 발견됐다.

▲ 군대와 사회는 변 하사의 존재를 부정했다. 변희수 하사가 세상 앞에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며 일말의 희망을 보였지만, 변 하사의 죽음에 대해 육군은 “민간인 사망 소식에 따로 군의 입장은 낼 것이 없다”고 해 빈축을 샀다. Ⓒ KBS

남성과 여성, 이분법적으로 나뉜 세상에서 변희수 하사와 같은 성 소수자가 설 자리는 없다. 정부 차원의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국내에 성 소수자가 몇 명인지 통계조차 없다. 한쪽에서는 ‘여자도 아니면서 여자인 척 한다’고 멸시하고 다른 쪽에서는 ‘치마, 긴 머리 등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여성의 성기를 탐한다’고 배척한다. 페미니즘 이론가인 미국 버클리대 교수 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이 젠더에 기초한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트랜스 배제 페미니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트랜스젠더가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짓는 방식에 의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히 의미있다고 보았다. 

여성주의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성 소수자를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이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실현과 맞닿아있다. 트랜스젠더들은 주민등록상 성별과 실제 성별이 다른 게 신분 확인 과정에서 드러날까 두려워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직업선택이나 결혼제도 등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는다. 성 소수자가 차별받는 사회에서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는 헌법 정신이 실현될 수 없다.

사회적 시선 때문에 숨어있던 성 소수자들은 퀴어 퍼레이드에서 자신을 잠깐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성 소수자는 일상에서 보이지 않도록 강요받지만, 그들은 숨겨져 있을 뿐 없어진 것은 아니다. 성 소수자가 일상에서 지워지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존재가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은 변희수 하사가 음악과 만화, 게임을 좋아하고 고양이 ‘시엘’을 키우는 ‘냥집사’ 였다고 보도했다. 감성적이고 정이 많은 한 인간이었던 그를, 우리는 성 소수자 변희수’ 로만 기억한다. 성 소수자라는 정체성은 그가 다른 다양한 모습을 가진 인간이란 사실을 지워버리고, 일상적 억압의 명분이 된다. 이들이 더는 ‘특이한 존재’가 아니게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방법은 쉽다. 우리와 조금 다르지만 이들도 사람이란 걸 인식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된다.

(김현주 기자)

숨었던 이들을 드러나게 하는 차별금지법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스웨덴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받고,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 유토피아 같다는 북유럽을 향한 로망 때문이었다. 6개월간 그곳에서 생활하고 배운 것은 ‘유토피아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무상복지가 이뤄지기는 하지만, 의료 진료를 받으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는 등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고, 마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물가는 너무 높았다. 

유토피아의 환상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오기 전, 가족들과 북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중 한 곳이 ‘베르겐’이었다. 노르웨이의 옛 수도였던 베르겐은 항구 주변의 자그마한 형형색색의 건물들과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축제를 만났다. 시내버스 앞에 무지개 깃발이 달려있었고, 건물 곳곳에도 무지개 천막이 걸려 있었다. 처음에는 베르겐시의 상징인가 했지만, 시의 상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화려했다. 무지개 깃발은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알리는 상징물이었다. 한국에서도 본 적이 있지만 베르겐에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건, 한국과 달리 무지개 깃발이 숨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일 타는 버스에서도, 걸어가면 쉽게 마주치는 건물에서도 무지개를 만났다. 수많은 무지개를 보며 다시 정의 내렸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지 않다. 이곳엔 ‘배제되는 사람이 없다.’

도시 중심부 곳곳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만났다. 내가 방문한 시기에는 축제 준비 기간이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영상을 통해 확인한 축제는 말 그대로 ‘축제’였다. 시민들이 도로 주변에 서서 환호하고, 프라이드 행렬은 번화가에서 어떤 제약도 없이 자신을 맘껏 뽐냈다. 누군가의 지향성을 ‘반대’한다는 폭력의 문구도, 광장 한곳에 모여 행사를 치러야 한다는 ‘억압’도 없었다. 

▲ 작은 항구도시인 베르겐 곳곳에는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무지개는 광장 한 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누군가의 지향을 격렬히 비난하는 목소리에 덮여버린 것도 아니었다. 버스 위에, 건물 옥상에 눈이 닿는 모든 곳에서 무지개는 빛나고 있었다. 당신이 누구든 환영한다는 포용의 상징이었다. © pixabay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모습은 축제에서만이 아니었다. 생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교환학생을 하던 학교에 처음 갔을 때 당황했던 건 성별 구분이 없는 화장실이었다. 남녀가 같은 화장실을 사용한다. ‘성 중립 화장실’이었다. 트랜스젠더 등 성 소수자가 외향적인 차이로 인해 화장실 이용을 어려워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였다. 북유럽에서 축제가 말 그대로 모두가 즐길 수 있었던 건, 생활 속에서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문화와 환경이 마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퀴어문화축제는 2000년 서울에서 처음 시작해 지금은 지역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퀴어축제는 개최될 때마다 논란에 휩싸였다. 제주의 경우 1회 축제가 열렸던 2017년, 지자체가 장소 사용을 허가했다가 축제를 반대하는 여론을 못 이기고 철회했다. 지자체를 상대로 한 행정처분집행정지 소송에서 조직위 측이 승소해 축제는 열릴 수 있었지만, 파행은 계속됐다. 이어진 2회 행사에서는 반대 측이 거리 행진을 막아서 행사는 제한적으로 진행됐다. 서울 또한 마찬가지다. 2019년에 열린 20회 행사에 15만 명의 인파가 몰릴 정도로 호응을 거두고 있지만, 반대 측의 공세 또한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동성애는 죄’라는 팻말을 들고 퍼레이드 행렬을 막거나, 행사장 근처에서 일명 ‘동성애 반대 시위’라는 이름으로 성 소수자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 정치권에서 논의가 시작된 지 14년만인 지난해 6월, 차별금지법이 국회에 발의됐다. 모든 국민이 차별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보장을 이루자는 게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골자다. 법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기성 정치권과 사회는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여전히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 SBS

우리 사회의 성 소수자에 대한 시선은 여전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대표적이다. 2006년 7월, 노무현 정부가 인권위 권고로 내놓은 차별금지법은 2008년 노회찬 의원에 이어 2011년, 2013년에도 제출됐지만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14년이 지난 21대 국회에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발의로 새롭게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차별금지법이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차별금지법이 개인의 성적지향을 바꿀 가능성도 높다고 비판한다. 사실과 다르다. 성적지향 자체가 개인의 의지와 환경의 변화를 이유로 생기거나 없어지는 게 아니다. 법안은 성적지향 등을 비롯한 이유로 고용, 재화와 용역, 교육 및 행정 서비스 차원에 있어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지 성적지향의 변화를 ‘조장’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장혜영 의원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차별금지법 도입이 보이지 않았던 이들을 눈에 띄게 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차별금지법은 존재 자체가 지워진 이들이 사회 속에서 다시 존재를 얻게 되는 최소한의 장치인 것이다.

해외에서는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노력이 지속해서 이어져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평등법이다. 영국은 산재해있던 차별금지 법안들을 한데 모아 2010년 ‘평등법(Equality Act)을 제정했다. 이 법안은 전 세계 차별금지법 중에서도 가장 상세하고 구체적인 법안으로 불린다. 평등법은 연령, 성별, 기혼 여부, 인종, 종교, 성적지향 등의 차이가 직장, 교육, 경제 활동 등의 과정에서 차별로 이어지는 것을 구체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북유럽 국가들은 적극적으로 반차별법을 추진해 왔다.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 4개국은 1970년대 말, 성 평등 법안을 만들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 사이에는 성 평등 법안과는 별도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더욱더 폭넓게 차별을 규제했다. 2020년 핀란드에서 열린 성 소수자 축제 ‘헬싱키 프라이드’에서 핀란드 산나 마린 총리는 핀란드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행사의 공식 후원을 맡기도 했다. 이 축제에 진보 정치인인 산나 마린 총리와 사민당만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보수 정당인 국민연합당, 핀란드 대표 기업 노키아, 심지어는 핀란드의 국교로 불리는 루터교 교회까지 공식 후원자로서 이름을 올렸다. 북유럽에서는 정치적 입장, 종교적 신념을 넘어 ‘차별 없는 사회’라는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제도와 인식이 이어지고 있다. 

스웨덴 교환학생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사람들은 북유럽의 자연 풍경, 하얗고 깔끔한 인테리어, 고즈넉한 도시 풍경 등 다양한 답변을 기대한다. 나는 횡단보도를 눈치 보지 않고 건너는 장면이라고 답한다. 횡단보도는 신호등을 대신해 사람이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겨우 횡단보도를 건너갈 수 있다. 스웨덴은 다르다. 사람이 먼저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 때, 자동차들이 먼저 멈추어 선다. 사소하지만 내가 사람으로 존중받았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유럽은 성 소수자들도 동일하게 대한다. 자신들이 존중받는다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피해받지 않는다는 안전감을 느낄 때 세상의 축제는 진정한 축제가 된다.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지만, 존중받지 않아야 할 사람도 없다. 일상에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배제하지 않는 시선과 태도가 그 시작이다.

(나종인 PD)

규정짓고 분리하는 데서 역사는 멈춘다. 이병주의 소설 <소설·알렉산드리아>에 “소수의견이 후세의 제도로 승격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의 발전이라고 부른다”는 대목이 나온다. 다름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태도를 문화로 안착시켜 직접 향유할 때, 사회는 비로소 한 단계 나은 사회로 발전한다. 그것이 바로 ‘문명사회’다. 한 의원의 말처럼 퀴어 축제는 퀴어 축제를 보지 않을 권리를 앞세워 다수와 소수, 이성애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분리하는 자리가 아니다. 소수만의 이익을 외치는 현장도 아니다. 다르다고 해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사람은 그저 사람으로 보면 된다. 지금 왜 우리에게 축제가 중요한가.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 공동체의 축제는 나와 네가 어떤 성을 사랑하든지, 모두 같이 살아야 하는 인간임을 공유하고 인정하며 인식하고 혁명하는 삶의 축제가 돼야 한다.


[청년기자의 시선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선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축제’이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은 축제의 계절이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곳곳에서 벌어지던 다양한 행사들, 마음도 덩달아 부풀어 올랐었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춘 오늘, 돌아올, 아니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축제를 꿈꾼다. (편집자)

편집 : 김대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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