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적과 백’

▲ 조한주 기자

인도의 부유층과 권력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타지마할 팰리스 호텔에 도착한 몇몇 청년은 수세식 변기를 처음 보고 신기해한다. 그리고 욕실에 부상당한 채 숨어있던 여성을 죽인다. 동네에 변변한 화장실이 하나도 없는 열악한 곳에서 살아온 청년들은 돈을 많이 준다는 이유로 테러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죽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호텔 뭄바이> 이야기다.

비슷한 장면을 그린 러시아 회화가 있다. 빅터 폴랴코프가 그린 ‘겨울궁전 습격 이후’에는 한 청년 병사가 놀란 표정으로 궁전 내부를 올려다본다. 걸친 것은 끝이 닳아 해진 코트, 신은 건 낡은 장화. 머리에는 위장용 낙엽을 꽂았고 가진 건 어깨에 멘 장총 한 자루가 전부인 그는 평생 본 적 없는 광경을 목격한다. 황금 샹들리에와 황금 액자 그림, 황금 의자 등 러시아 황가 사치의 끝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겨울궁전의 사치스러운 모습을 본 적이 없던 혁명군은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 빅터 폴랴코프가 그린 '겨울궁전 습격 이후'(1917). ⓒ Soviet Art

겨울궁전을 지배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은 암군이었다. 20세기 초 전 세계를 휩쓴 생산 과잉 현상이 러시아에도 몰아쳤다. 노동자 생활은 처참했고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와 그 가족 20만 명은 최소한 생존 조건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그들은 ‘신이여 차르를 보살피소서’라며 차르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발포 명령이었다. 1905년 1월, 차르의 군대는 평화롭게 시위하는 민중 천여 명을 죽였다.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부터 12년이 지난 1917년 3월, 무장한 군인들과 시위대는 차르가 있는 겨울궁전으로 몰려갔다. 러시아 황제를 상징하는 깃발이 내려가고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이 올라갔다. 로마노프 황가는 시베리아로 이송되는 도중 혁명군에게 비참하게 살해됐다. 니콜라이 2세의 어린 아들과 딸들도 예외는 없었다.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이 차르의 부활을 외쳤지만 끝내 이긴 건 붉은 색 소비에트 혁명이었다.

▲ 지난달 27일 오전 광주 동구 5·18 민주광장에서 시민들이 미얀마 민주화 시위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헌화하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숨진 사람에게 붉은 색 꽃을 바치는 풍습이 있다. ⓒ <연합뉴스>

혁명의 색으로 붉은 색을 사용하는 이유는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흘려야 비로소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약자가 기득권에게 뜻을 관철하기 어렵다는 뜻도 된다. 프랑스혁명부터 5.18광주민주화운동과 6월민주항쟁 모두 시민의 피가 흘렀다.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에서도 매일 피가 흐른다.

순결을 강조하는 백색은 적색을 이길 수 없다. 조금만 색이 섞여도 ‘깨끗하다’는 정체성을 잃는 백색은 다수의 결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러시아내전에서 결성된 적군은 탈영률이 한때 20%에 이를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는데도 차르 부활을 외친 백군을 이길 수 있었다. 적군은 노동자와 대중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백군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은 볼셰비키정부를 막으려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백군을 도왔지만 징집에 신분과 제한을 둔 백군은 모든 사회 계급을 모은 적군에게 패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혁명은 진정성으로 완성된다. 개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흐릿한 색깔로는 개혁을 밀고 갈 동력을 확보하지 못한다. 수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우리 사회가 제도와 관습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이유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김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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