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김정민 기자

지난해 11월, 충북 보은의 한 초등학교에서 어느 선생님을 만나 인터뷰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알록달록하게 꾸며놓은 학교 매점에 촬영 장비를 세팅했다. 추운 날씨라 카메라를 잡은 손이 자꾸만 곱았다.

그는 말투가 담담하고 건조한 30대 후반의 남성 교사였다. 키가 크고 마른데다 무뚝뚝해 보였다. 무기력한 직장인을 연상시키는 인상이었다고 하면 실례일까. 그런데 그에게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아이들을 복종하지 않는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 교사의 목표가 아닐까요.”

시골학교 선생님답지 않은 거창한 포부라고 생각했다. 촬영 기자는 화면을 계속 지켜봐야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자신이 일군 변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의 눈빛이 거기 있었다.

처음 <단비뉴스> 취재를 위해 충북 보은의 판동초등학교에 간 이유는 단순했다. 촬영을 기획한 선배는 아이들에게 기본소득을 매주 이천 원씩 주는 학교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획 다큐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영상 촬영과 편집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나는 기꺼이 팀에 합류했다. 사전 취재를 위해 그 학교 아이들의 언론 인터뷰를 정리하면서도 무덤덤했다. 요새 재난지원금 덕분에 기본소득 논의가 유행을 타는구나 싶었다. 지방의 초등학교에서도 재미 삼아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한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취재 첫 날 만난 선생님은 ‘집에서 용돈을 충분히 받는 친구들만 매점에 오더라’며 기본소득 제공의 당위성을 열심히 설명했다. 아이들이 경쟁과 차별을 먼저 배우기보다는 학교에서만이라도 지지를 받는다는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싶다고, 그런 지지를 받아 본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을 지지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차분해 보이는 내면에 숨겨진 한 초등학교 교사의 열정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선생님, 생각보다 본격적인데?’  

판동초등학교는 전교생 41명의 작은 학교였다. 학년마다 반이 하나밖에 없었다. 2층짜리 학교건물은 논밭에 둘러싸여 있었다. 학교 바로 옆에는 소를 키우는 농가가 있었고 그 너머에는 인삼밭과 고구마밭 등이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마을 곳곳을 도는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매순간 배고픈 아이들이 간식을 사 먹을 곳은 마땅치 않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건강한 간식을 주기 위해 학부모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꾸려 학교 매점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매점을 찾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형편이 넉넉한 아이들만 돈을 들고 간식을 사 먹는 모습을 보며 어느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협동조합 회의에서 의견을 냈다. 아이들에게 매주 공평하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것. 지역의 다른 학교에서 힌트를 얻었다. 충북 지역에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은율중학교와 청소년 기본소득 실험을 하고 있는 안내중학교가 있었다. 그는 다른 학교의 사례를 보며 초등학교 버전으로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마침 선생님의 지인이 좋은 일에 써 달라며 100만 원을 기부했다. 그 기탁금이 프로젝트의 발판이 됐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10명 남짓한 학교 선생님들과 다른 조합원들도 그의 계획에 찬성했다. 그렇게 매주 이천 원씩, 12주간 모든 아이들에게 매점 화폐를 지급하는 기본소득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 판동초 매점화폐. 판동초 아이들은 매주 월요일 기본소득으로 매점화폐를 2장씩 받는다. ⓒ 단비뉴스

11월 셋째 주 월요일 오전 9시, 선생님은 매점에서 통용되는 천 원짜리 매점 화폐 한 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매점쿠폰 천 원’이라고 적힌 매점 화폐는 흰 바탕에 숫자와 글자와 그림을 넣어 지폐처럼 꾸민 종이였다. 선생님은 매점 화폐를 두 장씩 복도에 놓인 ‘기본소득 게시판’에 꽂았다. ‘기본소득 게시판’은 그가 담임을 맡은 5학년 교실 복도에 있었다. 게시판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각각 적힌 봉투가 붙어 있었다. 

매점 화폐를 다 꽂은 선생님은 방송실로 가서 마이크를 들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울려 퍼졌다. “여러분. 어린이 기본소득, 매점 화폐를 꽂아놨어요. 기분 좋은 월요일 되고 자기 자리에서 매점 화폐 두 장씩 찾아가길 바랍니다.”

아이들이 속속 나타나 자기 몫의 기본소득을 챙겨갔다. 어떤 아이는 친구와 손잡고 달려왔다. 바로 옆에 있는 교실에서 총총 걸어 나와 기본소득을 쏙 뽑아가는 아이도 있었다. 매점 화폐가 2천 원보다 더 많이 꽂혀있다며 주인을 찾다가 선생님께 돌려드리러 오는 아이도 보였다.

오전 10시 25분, 30분씩 주어지는 중간놀이 시간이 됐다. 10여 명의 아이들이 매점으로 우글우글 몰려들었다. 교실 하나를 통으로 비워 만든 매점은 정신없이 붐볐다. 매대 양쪽으로 뻗은 진열장에는 라면땅, 달고나 사탕, 초코파이 등 과자가 즐비했다. 필기 도구 등 학용품이나 공책에 붙일 수 있는 스티커, 장난감 등도 진열돼 있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에는 핫도그와 김치 만두가 있었다.

과자와 장난감을 고르는 작은 얼굴들이 진지했다. 김치 만두와 핫도그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학용품이나 장난감도 잘 팔렸다. 물건을 고른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서로 밀고 당기며 매대 앞에 줄을 섰다. 기본소득으로 받은 매점 화폐를 작은 손으로 꼭 쥔 아이들도 보였다. 요일마다 번갈아 매니저를 맡는 6학년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 매대에 앉아 계산을 해주고 있었다.

우리도 군침이 돌았다. 취재를 갈 때마다 매점에서 핫도그와 초코파이를 사먹었다. 다 자란 어른도 주림을 참기 힘든데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면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가는데 나는 매점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어린 나이에 얼마나 박탈감을 느낄지도 상상해보았다. 취재하는 마음이 조금씩 진지해졌다.

▲ 판동초 매점은 교사, 학부모, 학생이 함께 운영한다. 중간놀이 시간에는 6학년 학생들이 돌아가며 매대를 맡는다. ⓒ 단비뉴스

석 달에 걸쳐 촬영하는 내내 아이들을 인터뷰했다. 개구쟁이처럼 웃고 떠들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우리에게 ‘학교에 오는 게 더 즐거워졌다’고, ‘예전이랑 달리 매점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친구들에게 사줄 수 있어서 기분 좋다고 말하는 아이도, 심부름을 해야만 받을 수 있는 용돈과 달리 기본소득은 아무 조건 없이 받을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기본소득을 다 쓰고 가야 한다는 예비 졸업생, 모아서 기부하겠다는 예비 전학생, 친구가 기본소득을 받자마자 탕진하는 게 걱정된다는 전문 잔소리꾼까지. 아이들이 조그만 머리로 열심히 생각하고 계획해서 소비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 혼자 서면 수줍음을 타다가도 진솔한 얘기를 스스럼없이 들려주었다. 밋밋한 마스크와 시커먼 롱패딩으로 온몸을 칭칭 감싼 채 카메라를 들고 따라붙는 우리에게 웃음을 빼어 물며 손 흔들어주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졌다.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매점은 학교의 나들목이 됐다. 아이들이 드나들었고, 뒤이어 학부모들도 자발적으로 매점에 나와 일을 도왔다. 지역사회가 학교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가는 한가운데 매점이 있었다. 매점 화폐는 그 나들목으로 향하는 평등한 티켓이었다. 

한 때 나는 거대 담론에 취해, 일상에서 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했다. ‘그런 일 해봤자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학교를 다녀오면서 내 마음속에 두근거림이 생겼다. 작지만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40여 명의 초등학생들에게 평생 동안 긍정적 영향을 주게 될 즐겁고 행복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변화가 아닐까.

지역 사회에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우리 사회의 변화는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큰 변화를 이끌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 역시 큰 변화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그렇게 조금씩 자기 주변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 나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닐까. 

한 계절에 걸친 촬영과 편집이 끝났다. 내 촬영능력과 편집기술은 여전히 고만고만하다. 그러나 마음가짐은 예전과 달라졌다. 밑바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변화를 만드는 일의 경이로움을 알게 됐다. 2천 원의 기본소득으로 더욱 행복해진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우리가 만든 다큐는 3월 31일 KBS 열린채널에서 방영된다. 방영당일 밤 10시에 <단비뉴스>에서도 보도할 예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변화를 함께 기뻐하고 공감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편집 : 오동욱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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