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적과 흑’

▲ 유재인 기자

영화 ‘레미제라블’의 노래 중 ‘적과 흑’(Red and Black)이라는 노래가 있다. 남자 주인공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사랑에 빠진 후 붕 뜬 마음으로 혁명을 앞둔 친구들을 찾아온다. 혁명 대장 앙졸라와 마리우스의 서로 다른 상황이 색으로 대비돼 노래로 만들어진다. 앙졸라는 ‘붉은 색은 민중의 분노, 검은 색은 우리가 겪은 과거의 시간’이라고 하는 반면, 마리우스는 ‘붉은 색은 불타는 나의 마음, 검은 색은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노래 속 붉은 색과 검은 색처럼 앙졸라와 마리우스의 상황도 대의와 개인의 욕망으로 대비된다. 개인이 종종 마리우스처럼 대의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명제다. 사소하게는 횡단보도가 없는 곳에서 무단횡단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부터 애국과 친일, 회사 조직문화와 개인의 삶 사이 갈등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선택의 순간에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인품이나 삶의 방식이 결정된다고 배워 왔다. 늘, 대의를 선택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비난받아왔다. 

▲ 검은 사과가 더 많다고 붉은 사과보다 '더 좋은' 사과는 아니다. ⓒ Pixabay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집단은 늘 옳은 결정을 내린다고 여겨졌고, 튀는 개인은 억눌렸다. 과도한 집단주의 문화가 개인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 또한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다. 지난달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같은 당 김종철 대표에게 성추행당한 사실을 밝혔다. 정의당은 김 전 대표를 직위해제했지만 공동체적 해결을 원하는 장 의원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했다. 집단에 의해 개인에 가해지는 폭력이 용인되던 과거보다는 진일보한 모습이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얼마 전 휠체어를 탄 보행 장애인들이 서울 지하철 5호선에서 역마다 타고 내리는 행동을 반복하며 시위를 벌였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게 목적이었다. 이들의 시위로 열차 운행이 지연되자 어떤 이들은 눈총을 주기도 하고, 대놓고 욕을 하기도 했다. 언론은 이들이 왜 시위하는지보다 시위에 따른 지하철 운행 지연에 초점을 맞춘 보도를 했다. 

▲ 지난 3월 12일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며 서울 지하철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여의도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시위를 벌였다. © 연합뉴스

시위하는 몇몇 장애인 때문에 지하철에 탄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개인의 욕망이 대의를 무시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시위는 개인의 욕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세상,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세상이 될 수 있게 만드는 행위다. 다수가 늘 옳은 것도, 대의가 늘 개인의 욕망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듣는 자세다. 

 ‘적과 흑’(Red and Black) 노래 말미에서 앙졸라는 마리우스의 선택을 요구한다. 마리우스는 결국 마음을 접어 두고 친구들과 함께 ‘붉은 색은 민중의 분노, 검은 색은 우리가 겪은 과거의 시간’이라 외치며 시위에 나간다. 마리우스의 이야기에 제대로 귀 기울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그의 마음을 무시한 채 서둘러 혁명을 준비하라고 재촉한다. 선택이 달랐으면 어땠을까? 마리우스는 자신의 선택을 잘한 일이라고 여겼을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방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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