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취화선'의 한국 영화 세계화 전략

초등학생 때 텔레비전에서 ‘스크린 쿼터’라는 말을 들었다. 자국 영화 의무 상영 제도를 말한다. 2006년 1월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연간 국내 영화 상영일 수가 146일에서 73일로 줄었다. 스크린 쿼터 축소는 미국 정부의 요구였다. 영화계는 반발했다. 영화배우 안성기 씨가 마이크를 잡은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한국 영화가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오늘날에는 먼 이야기로 들린다.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27편 중 19편이 국내 영화다. 2018년 기준 국내 영화 점유율은 50.9%다. 국내 시장에서 한국 영화의 경쟁력은 상당히 높다.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우리 영화를 만드는 건 많은 영화인의 목표였다.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도 그랬다. 1962년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1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 최고의 상은 2002년 칸영화제에서 받은 감독상일 것이다. 조선 후기 화가 오원 장승업의 일생을 담은 영화 <취화선>으로 한국 장편영화 중 최초로 칸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당시 언론은 “한국 영화계의 숙원이 풀렸다”며 “한국 영화가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 2002년 5월 임권택 감독은 <취화선>으로 제55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 KBS

지난해 2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 4관왕을 달성한 봉준호 감독은 “순전히 한국적인 것들로 가득 찬 <기생충>으로 여러 나라에서 반응을 얻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봉 감독이 이 영화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을 담았다면, 임 감독은 <취화선>에 한국의 전통을 담았다. 고아로 자라 화원으로 궁궐까지 들어간 장승업(최민식 분)의 일생을 통해 조선 후기 생활상을 재현한 영화다. 눈에 띄는 것은 그 시대의 그림이다. 영화 속 장승업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감독은 영화에 장승업의 그림을 담는다.

한국화를 영상에 담다

“한국화에는 영화적 단점이 있어요. 가로가 너무 길든지, 아니면 반대로 세로가 너무 길어서 필요 없는 여백이 너무 많이 생긴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림이 한국화라는 데 있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정성일 평론가와 인터뷰하면서 한국화를 영상에 담아내는 것이 어려웠다고 했다. 촬영감독의 말처럼 <취화선> 속에서 장승업이 그리는 그림은 족자에 담을 수 있게 세로로 길거나 병풍처럼 가로로 길다. 1.85:1 비율의 화면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취화선>은 한국화를 담기 위해 카메라 무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영화는 첫 시퀀스에서 장승업이 완성한 그림을 제시한다. 두 컷은 인물이 그림을 펼치는 쇼트와 그림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틸팅하는 쇼트로 구성됐다. 영화 3분의 1 지점에서 나오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패닝 기법으로 표현했다. 그림을 감상하는 양반의 시선을 따라가듯 중간에 한 번 쉬어가는 호흡을 둔 것이 눈에 띈다. 영화 중반 ‘노안도’를 그리는 장승업은 그림 중간 클로즈업 화면에서 시작해 패닝과 줌아웃을 동시에 활용해 표현한다. 카메라 움직임이 빨라 그림 그리는 장승업이 역동적으로 보인다.

▲ ‘노안도’를 그리는 장승업을 하나의 쇼트로 담았다. 패닝과 줌아웃이 빠르게 이뤄져 역동적이다. ⓒ 시네마서비스

<취화선>은 장승업의 그림뿐 아니라 그림의 대상을 한국화의 시선으로 담았다. 한국화를 포함한 동양의 산수화가 다시점이라는 점을 활용했다. 동양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는 그림에서 어색함을 느낀다.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는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는 멀리 있는 대상과 가까이 있는 대상 모두에 시선이 모이기 때문이다. 시점이 하나인 카메라의 한 컷으로는 동양화를 재현하기 어렵다. <취화선>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클로즈업, 롱 쇼트 등 다양한 사이즈의 화면 조합으로 한국화를 표현했다. 

▲ 장승업의 ‘귀거래도’. 위에서부터 산은 아래에서, 집은 정면에서, 강은 위에서 바라본다. 일반적인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시선이다. ⓒ 간송미술관

영화 초반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꽃과 물방울이 맺힌 거미줄 등의 클로즈업은 장승업의 그림으로 재현된다. 에피소드들 사이 시간의 흐름과 장승업의 방랑을 표현하는 인서트는 대부분 롱 쇼트와 풀 쇼트를 활용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자연 속 왜소한 인물은 동양화의 한 장면을 닮았다. 촬영감독은 2001년 정성일 평론가 인터뷰에서 “롱 쇼트나 풀 쇼트를 찍더라도 이번에는 와이드 렌즈를 사용하지 않을 참”이라고 했다. 광각렌즈는 화면을 왜곡해 원근감을 강조한다. 서양의 그림처럼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광각렌즈 활용을 자제한 <취화선>의 롱 쇼트와 풀 쇼트는 장승업의 시선을 설명할 뿐 아니라 장승업의 그림 자체를 표현한다.

▲ 장승업이 돌산을 바라보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첫 번째 장면을 더 폭넓게 촬영해 원근감을 살렸을 것이다. ⓒ 시네마서비스

한국화를 대사에 담다

“모란은 부귀영화를 뜻하니라. 복숭아는 선계의 과일이니 천수를 누리라는 뜻이오, 게는 등에 갑이 있어서 장원급제를 뜻하지만 뒤로 물러서기도 잘 하니 사내는 모름지기 진퇴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영화 중반에서 장승업을 포함한 혜산 유숙의 그림 제자들이 고을 수령의 초대를 받는다. 이들이 수령의 부탁으로 ‘가관진작'(승진을 의미)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 수령은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보며 어린 아들에게 그림의 의미를 설명한다. 아들에게 설명하는 형식을 활용해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 고을 수령은 아들에게 ‘가관진작’과 그림 속 소재의 의미를 설명한다. 영화 속 화자는 아들이지만, 관객을 위한 설명이기도 하다. ⓒ 시네마서비스

한국화를 영상으로 담아내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동양화가 ‘읽는 그림’이라는 사실에 있다. 수령의 설명처럼 동양화의 여러 소재는 저마다 뜻이 있다. 영화는 영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정보를 대사에 담았다. 장승업이 유숙의 제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영화 초반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자네 시화의 성인 소동파를 아는가? 천지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고 그림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게야. 어차피 그림 속에는 화가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게지.”

“우리 환쟁이들한테는 뼈아픈 말일세. 사형(사물의 형상)을 넘어선 사의(사물의 뜻)라, 형체를 보지 말고 그 뜻을 그려내라 그 말일세.”

장승업의 정신적 지주인 김병문(안성기 분)은 동양화의 육법을 하나씩 설명한다. 

“경영위치(화면을 살리기 위한 배치법)라 화면에 짜임새 하며, 수류부채(그리는 대상의 종류에 따라 채색을 가하는 것)라 색의 조화하며, 응물상형(물체 자체의 모습, 특성 따위를 잘 알아 그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라 꼭 닮게 그린 솜씨가 흠잡을 데가 없구나.”

“조선 산수의 대맥은 진경일세. 그런데 자네의 산수는 실경이 아닌 선경이야. 소박한 현실이 아닌 과장이야. 진정의 발로가 아닌 치기일세.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의 고통스러운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릴 수는 없는가.”

▲ 대화를 나누는 장승업(오른쪽)과 김병문. 선비인 김병문은 영화 내내 어려운 말을 쏟아낸다. ⓒ 시네마서비스

영화가 사극인 점을 고려하더라도 쉽지 않은 문장이다. 서정남 영화평론가는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내뱉는 동양화의 예술철학”이라는 말로 문어체에 가까운 대사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실제로 배우들의 대사가 일상에서 이뤄지는 대화라기보다 강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동양화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관객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영상만으로 그림이 뜻하는 바를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동양의 사상이 담긴 대사는 해외 관객을 노린 전략일 수 있다. 번역을 거친 대사는 배우의 감정을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국내 관객이 느끼는 어색함은 상쇄되고 한국화 속에 담긴 철학은 전달되는 것이다. 2002년 칸영화제 당시 장승업 역을 맡은 배우 최민식 씨는 “(관객들이) 한국화가 지닌 시각적 아름다움 외에 그 속에 담긴 철학적 의미에 깊이 매료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화를 ‘영화’에 담다

<취화선>은 장승업이라는 인물뿐 아니라 한국화를 영화에 담았다. 하나의 컷으로 담을 수 없는 동양화는 역설적으로 영화적이다. 동양화가 작가의 시점을 조합하여 하나의 세계를 형상화하듯 영화는 다양한 시점을 조합하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동양의 사상이 담긴 대사는 난해하지만, 한국화를 재현하는 측면에서는 효과적이다. 이를 통해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취화선>은 ‘한국적인 것들로 가득 찬' 영화다. 한국화를 담아낸 영상 언어마저 한국적이다. 영화는 한국화를 영상 언어로 번역했다. 번역에 성공하여 국내 장편영화 최초로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장승업이라는 매력적인 인물, ‘천재 예술가의 고뇌’라는 보편적 스토리도 주효했지만, 한국화를 영화화한 <취화선>의 영상 언어를 빼놓고 영화의 성공을 논할 수 없다. 임권택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장승업이 자기 인생과 닮았다고 말했다. 한국의 그림을 그린 장승업처럼 임 감독은 <취화선>이라는 두 시간짜리 한국화를 그렸다.


편집 : 김은초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