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언론사 CEO 신년사’ ➀ <한겨레>

[청년기자의 시선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선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신년 첫 주제는 ‘언론사 CEO 신년사’로, 청년기자가 언론사 CEO가 되어 시대정신과 언론의 역할을 제시한다. 지난해 우리를 덮친 코로나는 지구와 생명, 노동과 부의 불평등, 사회적 약자의 고통 문제 등 사회와 인간을 근본에서 돌아보게 했다. 세상에는 여전히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언론은 정파주의에 빠져있다. 뉴노멀이 화두로 떠오른 2021년, 지난해에 이어 언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묻는다. (편집자)

새해를 열면서 질문하겠습니다. <한겨레> 사우 여러분, 2020년 최대 이슈는 무엇이었습니까? ‘검찰개혁’인가요? 그렇다면 한 번 더 묻겠습니다.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와 검찰을 상징하는 총장, 어느 한 편에서 검찰개혁을 바라보진 않았나요? 지난 1년 동안 법무부와 검찰 수장 간 갈등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면서, 언론이 놓친 게 있습니다. 바로 국민입니다. 검찰개혁은 그동안 만연한 자의적 수사와 기소에서 벗어나, 불편부당하고 정의롭게 법을 집행해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정치권이, 이해당사자들이 검찰개혁의 정신과 본질을 벗어나 정쟁을 거듭할 때 언론도 따라 춤추었습니다. 우리 <한겨레>는 언론이 원칙과 기본에서 벗어났다는 비판에서 과연 자유로울까요? 

‘진실과 평화’는 실현해야 할 시대정신

<한겨레>는 갈등과 대결이 뚜렷할 때, 약자 편에서 본질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세상이 오래됐지만 미결된 문제를 잊어갈 때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새해 첫날, 저는 사우 여러분과 <한겨레> 창간정신을 되새깁니다. <한겨레>는 지난 2018년 ‘진실과 평화’를 새 가치로 선언했습니다. 1988년 창간 당시 ‘민족 민주 민중’으로 세운 창간이념을 새로운 담론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다시 세운 가치가 옳았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진실이 위협받고 언론의 신뢰도가 바닥난 사회입니다. 진영으로 갈린 사람들은 유튜브에서 쏟아지는 허위·조작정보에 빠져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조차 안 합니다. 새해에 유튜브에서 말라리아 치료제 약품이 코로나19 치료 효과가 있다는 잘못된 정보가 돌았습니다. <한겨레>가 잘못된 정보임을 알리는 기사를 썼지만, 오히려 기자가 항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사실을 알려도 오히려 의심받는데 이면의 부조리와 금기를 깨고 진실을 추구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평화는 정체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다시 남북이 주체가 되어 평화체제 구축에 나서야 합니다. <한겨레>는 신축년 ‘진실과 평화’의 가치를 다시 세웁니다. 사실과 의견을 명확히 해 언론의 신뢰도를 높이겠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소극적 평화에 안주하지 않고, 한반도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적극적 평화를 추구해 나가겠습니다. 

▲ <한겨레>는 1988년 5월 15일 창간호 1면에서 ‘민족 민주 민중’을 창간이념으로 선언했다. 창간이념은 3년 전인 2018년, ‘진실과 평화’라는 시대정신으로 재탄생했다. © <한겨레>

‘진실과 평화’를 실천하는 첫걸음은 ‘오래됐지만 중요한 문제’를 되짚어보고, 사회의 기본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과제가 한국 사회가 직면한 세대갈등 담론입니다. 각 세대는 저마다 고통을 겪으며 싸우고 있는데 우리는 방치하고 있습니다. 각 세대가 상대의 생각을 먼저 이해하고, 자기 이익을 양보할 때 우리 사회에 평화가 만들어집니다. 고령사회에 진입한 지 오래지만, 제대로 된 요양을 받기 어려운 환경을 조명한 ‘대한민국 요양보고서’ 시리즈, 청년들이 한국 사회에서 경험하는 불공정을 짚은 ‘한국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 기획은 적절한 사례입니다. 코로나는 불평등을 심화했고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지향하는 ‘오래됐지만 중요한 문제’는 이 시대에 더욱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한겨레>는 2021년에도 ‘오래됐지만 중요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사회의 기본을 다시 세워 나가겠습니다. 

N번방 취재는 ‘끈기와 본질 추구’가 이룩한 성과

<한겨레>가 ‘오래됐지만 중요한’ 문제에 천착할 수 있었던 건 ‘끈기와 본질 추구’라는 한겨레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2019년 말 수면 위로 드러나 2020년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한겨레>가 지금도 좇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 성폭력 문제가 디지털 조직범죄로 진화한 것입니다. <한겨레>는 2019년 11월 25일,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세계’ 보도를 시작으로 이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 보도했습니다. 추적단 ‘불꽃’이 9월 최초 보도한 직후부터 어느 언론사보다 빠르게 N번 방 관련 보도를 심층 취재해 연재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디지털 성범죄 관련 논의를 이끌었습니다. 마침내 주범 조주빈과 일당이 붙잡혔고, <한겨레>는 관훈언론상과 양성평등미디어상 대상, 이달의 기자상 등을 받았습니다. 

범인이 잡혀 사람들 관심이 시들해진 뒤에도 <한겨레>는 취재를 이어갔습니다. ‘박사방’ 사건 판결문을 분석한 토요판 기획보도는 기계적으로 판결 결과를 보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판결 과정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전달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한겨레21>은 박사방과 N번방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디지털 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 아카이브’를 열었습니다. 이 아카이브는 N번방 가해자 조직도를 정리한 ‘n개의 범죄’, 성착취물 유포 판결문을 분석한 ‘n번의 오판’, N번방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연대의 역사를 담은 ‘n명의 추적’과 디지털 성범죄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성교육 만화 ‘n번방 너머n’, 디지털 성범죄 관련 기사를 모은 ‘기록’으로 구성됐습니다. 디지털 성범죄의 과거와 현재를 반성하며 앞으로는 디지털 성범죄가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한겨레>가 감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또 다른 ‘오래됐지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뿐이겠습니까.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부조리와 모순, 불평등 구조는 아직도 어두운 지하에서 우리 공동체와 삶을 노리고 있습니다. 일하러 갔다 목숨을 잃고 퇴근하지 못하는 노동자는 매일 7명씩 나옵니다. 책임 있는 어른들이 외면하는 사이 ‘정인이’ 같은 아동학대 사례가 2019년에만 3만명 발생했습니다. 한국 노인 자살률은 OECD 평균의 2배가 넘습니다. 청년 10명 중 1명이 최저주거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집에 삽니다. 지금 밝혀진 문제는 과거부터 쌓여온 폐단이 드러난 것입니다. 과거에 놓인 문제의 원인을 보지 못하면 미래를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한겨레>가 할 일은 ‘지금’ 관심을 끌 수 있는 기사를 쓰는 게 아닙니다. 지금을 이야기하며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그리는 일입니다. 이 시대에 ‘끈기와 본질 추구’가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새해 <한겨레> 실천 목표

코로나19로 서민들 삶이 무너지고, 가짜뉴스와 진영논리의 정쟁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지금, <한겨레>는 다시 창간정신을 실천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저는 <한겨레>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공감하는 <한겨레>가 됩시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노인 등 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이 <한겨레>가 주목해야 할 대상입니다. 작년 이맘때 <한겨레>는 ‘노동자의 밥상’ 기획 시리즈를 보도했습니다. 탄광에 사는 쥐가 도시락을 파먹기 때문에 도시락을 천장에 매달아 두는 태백 광업노동자, 폐지 120kg을 줍고 5천원을 벌면서 카스테라 빵과 두유로 끼니를 해결하는 노인, 화장실 바닥을 닦는 걸레 옆에서 쌀을 씻는 지하철 역사 청소노동자, 편의점 도시락과 에너지드링크로 밤샘 작업을 견디는 IT 노동자 등 15명의 노동자를 만나 그들의 밥상을 통해 삶을 기록했습니다. 앞으로도 <한겨레>는 평범하고 작지만 고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겠습니다.

윤리적인 <한겨레>가 됩시다. <한겨레>는 13년 만에 취재보도준칙을 재정비하고 저널리즘책무실을 신설했습니다. 독자의 신뢰를 되찾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실천은 어려웠습니다. 지난해 10월 가정폭력 원인을 피해자에서 찾는 김민식 PD의 글 ‘지식인의 진짜 책무’가 지면에 실렸습니다. 김민식 PD는 ‘책을 읽어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면 좋으련만 다독의 끝에서 지적 우월감만 얻었다’고 쓰며, 아버지가 책을 많이 읽은 어머니를 때리고 욕한 이유를 ‘어머니의 지적 우월감’에서 찾았습니다. 글이 지면과 인터넷을 통해 게시되자 가정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인 어머니에게서 찾는다는 독자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취재보도준칙 4장에는 차별과 혐오 금지가, 5장에는 약자와 피해자 보호가 명시돼 있습니다. 저널리즘책무실의 역할은 <한겨레> 콘텐츠의 적절성을 검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김민식 PD의 글이 <한겨레> 내부의 거름망을 통과했습니다. <한겨레> 시스템과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체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상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 윤리 측면에서 <한겨레>는 앞서 있습니다. 국내 언론사 최초로 1988년 창간과 함께 윤리강령과 윤리강령 실천 요강을 제정했으며 언론계에서 관습적으로 이뤄지던 촌지 수수 거부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남들보다 한발 앞서 있다고 만족할 수 없습니다. 

▲ <한겨레>가 2020년 개정한 취재보도준칙 주요 내용. 진실이 위협받고 언론의 신뢰도가 바닥인 지금, 오히려 언론은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라는 시대과제를 안고 있다. © <한겨레>

앞서 나가는 <한겨레>가 됩시다. 지난해 7월 문재인 정부는 한국판 뉴딜 구상을 발표했습니다. 그린뉴딜은 한국판 뉴딜 계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탄소중립을 2050년까지 실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는 탄소중립과 관련된 기후대응기금 조성과 녹색 분야 자금지원안도 담겼습니다. 정부가 내건 정책 달성 기한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과정을 면밀히 감시해야 되겠습니다. 정부가 제대로 일하는지 언론이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시대 화두는 단연 기후변화입니다. 기후변화는 진보 언론 <한겨레>가 깊이 다룰 수 있는 의제입니다. 기후변화는 단순히 환경 분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기후변화의 피해는 사회 취약계층에게 더욱 심각하게 와 닿습니다. 기후변화는 지금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경고입니다. <한겨레>는 지난해 4월 국내 종합 언론사 중 최초로 기후변화팀을 신설했습니다. 이 팀은 지난해 10월 국내 언론 최초로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를 인터뷰했습니다. 기획 ‘애니멀피플’을 통해 동물권 관련 논의도 꾸준히 이끌어왔습니다. <한겨레>는 앞으로도 우리나라 제1의 진보언론으로서 기후변화 문제를 더욱 집중해서 다루며 평등과 공정, 정의를 포괄하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에 관한 사회적 논의를 이끌겠습니다. 

깊이 있는 <한겨레>가 됩시다. 종합일간지는 모든 뉴스를 다루지만 어떤 뉴스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겨레>도 그 역설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남들이 다 다루는 뉴스를 다루면서 독자를 끌어올 수는 없습니다. <한겨레>는 <한겨레>만 할 수 있는 보도를 해야 합니다. 종합일간지 <한겨레>에서 ‘모두 다루는 뉴스’에 관한 부담을 줄이겠습니다. 특히 정치 뉴스를 대폭 줄이겠습니다. 정치인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는 따옴표 저널리즘은 사안에 관한 깊이 있는 논쟁을 방해하고 불필요한 정치적 갈등을 부추깁니다. 대신 시민들의 삶과 밀접한 주제에 집중하겠습니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의 역할을 강화해 보도에 깊이를 더하겠습니다. 뉴스매체는 위기여도 뉴스가 위기인 적이 없습니다. 홍수가 닥치면 마실 수 있는 맑은 물이 귀한 것처럼 오히려 뉴스의 욕구는 커졌습니다. 가짜뉴스 시대일수록 소비자는 사건의 맥락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심층탐사보도를 요구합니다. 탐사보도와 심층보도를 집중해서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겠습니다.

역사는 2021년 <한겨레>를 기억할 것입니다.

<한겨레>가 지난 5월 지령 1만호를 발행했습니다. 30년 동안 한국기자협회에서 주관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가장 많이 받은 언론사입니다. 사우 여러분이 함께 힘써 주신 결과입니다. 지나온 길보다 나아갈 길이 멉니다. 나아갈 길을 그리는 데 우리 언론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이 현장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 든든합니다.

2021년, 새해를 맞으며 재해재난이 일상화하고, 공동체와 인간의 삶이 무너진 이 엄중한 상황에서 언론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언론이 실현해야 할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물어봅시다. 시대는 언론에게 다른 가치와 역할을 요구합니다. 저는 그 요구를 <한겨레> 창간정신에서 찾습니다. 1988년 5월 15일, <한겨레>가 창간되던 날 <한겨레>의 다짐을 되새기며 신년사를 마칩니다. 국민의 시각에서 보는 신문, 기성언론과는 다른 시각이라는 <한겨레>의 초심, <한겨레>의 존재 이유를 기억합시다.

‘한겨레신문은 실로 4천만 국민의 염원을 일신에 안고 있다 해서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한겨레는 기성언론과는 달리 집권층이 아닌 국민대중의 입장에서,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위에서가 아니라 밑에서 볼 것이다. 기성언론과는 시각을 달리할 것이다.’ 


편집 : 이동민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