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제천 누룩공장 ‘중앙곡자’ 보전운동

누룩은 시간이 띄운다. 오랜 인고의 시간을 견딘 누룩은 ‘선생’ 칭호를 얻은 적도 있다. 고려 문신 이규보는 <국선생전>(麴先生傳)'에서 누룩을 선생으로 의인화해 당시 문란하던 정치와 사회상을 풍자했다. 그런 ‘국선생’이 근래까지 머물던 충북 제천시 누룩 발효 공장 ‘중앙곡자’가 세월의 무상함을 애써 견디다 58년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진다. 

▲ 충북 제천시 명동 194-2번지에 있는 누룩공장 ‘중앙곡자’ 건물 정면과 위에서 바라본 모습. 색바랜 슬레이트 지붕과 길게 뻗은 건물 구조가 인상적이다. © 제천시, 신지인

누룩곰팡이 대신 먼지만 수북한 공장 

충북 제천시 중심가인 명동에 있는 제천컨벤션센터에서 큰 길을 건너 작은 블록을 두 개 지나면 낡고 허름한 단층 건물이 나타난다. 2차선 도로를 따라 길게 서있는 길이 40m, 넓이 10m 남짓 되는 건물에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려주는 표지판이나 간판도 없다. 빛 바랜 슬레이트 지붕과 낡은 창틀이 군데군데 부서져 있어 보기만 해도 오랫동안 방치된 곳임을 알 수 있다. 1962년 창업해 누룩을 만들어 막걸리공장에 공급해 오다 지난 2011년 문을 닫고 방치돼 온 ‘중앙곡자’ 공장이다.

지난달 10일 오후 3시쯤 이곳을 지나가던 주민 이균하(22) 씨는 “이 동네에 산 지 제법 됐지만 오늘에야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건물을 처음 보았으니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당연히 모른다고 했다. 중앙곡자 2대 사장을 지낸 엄봉익 씨의 아들인 엄승호(72) 씨와 함께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엄 씨가 출입구에 쳐진 접근금지 띠를 풀고, 흰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미닫이문을 열자 오래된 창고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밖으로 풍겨 나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누룩을 감싸 발효시키는 데 사용하던 짚단 스무 개가 동그랗게 말린 채 시멘트 맨바닥에 놓여 있다. 

▲ 중앙곡자 건물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볏짚단.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채 시멘트 바닥에 방치돼 있다. © 신지인

건물 입구 정면으로 보면 누룩을 띄우던 발효실이 있다. 폭 1.8m, 길이 9m 방 안에는 양쪽으로 누룩을 띄우는 황갈색 나무 선반이 세워져 있다. 선반은 7개의 단으로 이뤄지고 단과 단 사이 간격은 한 뼘쯤 된다. 먼지가 가득 쌓여 있지만 나무는 상하거나 썩은 부분 없이 잘 보전돼 있다. 선반 위를 보니 볏짚가루들이 남아 있어 누룩을 띄우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이렇게 생긴 발효실이 중앙곡자에 모두 아홉 개가 있다. 

“2011년에 휴업계를 냈는데 사실 공장은 진작 멈췄어. 한창 때야 직원이 열두 명도 넘었지. 우리 집 막걸리 찾는 사람들이 줄어드는데 어쩔 도리가 있나. 반죽기나 고철처럼 돈 되는 것들은 다 팔았지. 먹고 살려고.”

▲ 누룩 발효실에 나무 선반이 세워져 있다(위). 밀을 찧고 반죽하던 목조 틀 앞에서 엄승호 3대 사장이 공정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아래). © 신지인

엄 씨의 말을 뒷받침하듯, 방앗간에 걸려 있는 달력은 ‘2003년 11월’에 멈춰 선 채 17년째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달력 옆에는 누룩을 빚어 틀에 찍어내는 설비가 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가로 세로 1m 남짓 되는 정사각형 목조 틀 안에 누룩 재료인 쌀을 넣고 찧은 뒤, 천장으로 들어 올려 반죽을 해서 모양을 내는 틀로 옮기는 공정이 진행되던 곳이다. 공장 휴게실이던 곳 한 켠에는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점심 메뉴판이 검게 그을린 채 걸려있다. ‘선지해장국 삼천 원, 비지장 삼천 원….’ 

▲ 직원 휴게실 벽에 걸려있는 점심 메뉴판(왼쪽)과 찧은 밀반죽을 다른 기계로 옮기기 위해 위로 들어올리던 장비(오른쪽). © 신지인

1962년 설립, 우리 양조 전통 이어

중앙곡자는 1962년 노의중 사장이 세운 누룩 제조장으로, 충북 지역 막걸리 공장에 누룩을 공급하는 원료공장이었다. ‘곡자(曲子)’는 ‘누룩’의 한자로, 밀이나 찐 콩 따위를 굵게 갈아 반죽해서 덩어리를 만들어 띄우고 누룩곰팡이를 번식시켜 만든다. 중앙곡자는 창업 후 3년이 지난 1965년, 쌀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쌀로 막걸리를 만들지 못하게 되자 쌀 대신 밀로 누룩을 만들어 공급하면서 우리 전통술의 명맥을 이어왔다. 1970년 엄봉익 사장과 그의 아들 엄승호 씨가 인수해 운영해왔으나 소주와 수입양주 등에 밀려 막걸리 수요가 감소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국세청의 ‘주요 주류 출고량 추이’에 따르면, 막걸리는 1974년 전체 주류 출고량의 74.2%를 기록하며 최고점을 찍은 뒤 희석식 소주와 수입 양주 등에 밀려 2001년 점유율이 4%까지 떨어졌다.  

▲ 국내 주류 출고량 추이. 막걸리(탁주) 소비량을 나타내는 파란색 선은 1974년 정점을 찍은 뒤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 신지인

매입한 제천시 공영주차장 추진

전통술 수요 급감으로 더 이상 중앙곡자를 유지할 수 없게 공장을 물려받은 엄승호 씨는 2011년 공식적으로 휴업하고 공장 문을 닫았다. 엄 씨는 휴업 후 9년 동안 건물을 유지해 오면서 가능하면 우리 고유 양조의 전통과 명맥을 이어 가기 위해 공장을 보전하려 했으나, 더 이상 유지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지난 7월 공장건물과 부지를 제천시에 매각했다.

제천시가 인수한 중앙곡자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공영주차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제천시민들과 고유 양조 전통을 보전하자는 외부 인사들이 가세해 중앙곡자 철거 반대 및 보전운동에 나섰다. 제천시는 18억원 예산을 들여 차량 45대를 세울 수 있는 공영주차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하고, 지난달 15일 철거에 돌입했지만 주민들 반발로 이틀 만에 작업을 중단했다.

중앙곡자 건물 철거를 반대하고 보전하라는 집단민원은 지난달 17일 공식 제기돼 제천에서 117명, 제천 밖 다른 지역에서 730명이 참여하는 등 847명이 동참한 가운데 참여자가 늘어나고 있다. 

“전통주가 숨쉬는 현장” 보전운동 확산

또 호주 출신으로 지난 2006년 한국으로 이주해 한국 전통술을 연구하고 해외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는 ‘더술컴퍼니’(The Sool Company) 줄리아 멜로 대표도 중앙곡자 보전운동에 동참해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지난달 21일 <코리아타임스>에 ‘(한국 고유의) 알코올 전통이 주차장 신설로 파괴된다’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그는 칼럼에서 ‘천연발효 재료로서 누룩은 효모 효소 박테리아의 다양한 균주를 함유하고 있는 살아 있는 문화재이며 그 자체로 예술’이라며 중앙곡자 보전을 촉구했다. 그는 “중앙누룩 공장은 벽과 나무, 선반의 밀짚 안에 살아 번성하고 있는 유기체의 식민지로, 한국 전통 알코올이 살아 숨쉬는 연결고리”라며 제천시의회에 제기하고 있는 ‘중앙누룩 공장 철거 재고’ 청원에 동참을 촉구했다.

▲ ’더술컴퍼니’ 줄리아 멜로 대표가 벌이고 있는 중앙곡자 보전운동 서명을 위한 홈페이지. © 신지인

중앙곡자는 지난 2011년 가동중단 후 부분적으로 공장설비 등을 처분하긴 했지만 건물자체와 일부 남아 있는 설비 등은 잘 보전돼 있어 문화재 가치가 상당한 곳이다. 국내에 남아 있는 곡자공장 중 누룩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설비와 여건을 갖춘 유일한 공장이었으며, 가동 당시 건물과 설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은 중앙곡자 한 곳 뿐이다.

제천전통주연구소 박상규 소장은 “중앙곡자의 건물 양식이 일본 영향을 받은 점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온도유지 기능이 상대적으로 미흡하던 한옥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며 “현대 양조에서도 이런 건물의 특성을 참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앙곡자는 보전가치가 높은 시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룩 띄우는 나무가 오랜 기간 방치됐는데도 썩지 않았고, 형태나 간격이 그대로 유지돼 있다”며 “밀을 빻는 방앗간과 누룩발효실이 놓인 구조 자체가 하나의 유형문화재”라고 말했다.

제천시가 ‘한방 바이오 시티’를 지향하는 것과 함께 지역 관광자원으로서 잠재력을 보완해 준다는 점에서도 중앙곡자는 보전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청풍호 등 자연관광자원은 풍성하지만 역사 유적 등이 많지 않은 제천시로서는 우리 고유 양조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중앙곡자를 보전해 ‘교동민화마을-약선음식거리-예술의 전당-중앙시장과 내토시장’으로 연결되는 관광클러스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곡자가 관광자원으로 활성화하면 지역을 아우르는 관광벨트가 조성될 수 있다. © 제천시

전국에서 전통 곡자 공장이 보전돼 있는 곳은 부산 산성누룩, 경남 진주곡자, 광주 송학곡자 세 곳 밖에 없다. 500여 년 전부터 누룩을 빚어 온 부산의 금정산성 누룩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애쓰고 있다. 금정산성 토산주 유혜수 공장장은 “산성마을 600가구가 집집마다 누룩을 만들던 시절도 있었다”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역 토착 균을 이용한 전통 방식의 곡자이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로 가치와 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주곡자와 송학곡자는 설비 자동화와 과학화로 시대의 흐름에 맞추며 한 해에 각각 1,200t과 700t의 누룩을 생산하고 있다. 특정 지역의 누룩 공장이 없어진다는 것은 막걸리 종류가 하나 사라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지역마다 누룩의 원료, 배양온도, 배합비율, 숙성기간이 달라 막걸리 맛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제천시 한방바이오과 김일준 팀장은 “중앙곡자의 누룩곰팡이가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빚어내는 특유의 술맛 때문에 살아있는 문화재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천시 “모든 유산 다 보전하긴 어려워” 

시민들과 전통술 보존단체 등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제천시는 주차공간 확보가 더 급선무여서 주차장 조성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제천시 교통과 손영범 주무관은 “누룩 공장을 보존하라는 민원도 있지만, 주차공간이 부족하다는 민원이 더 많았다”며 “공장을 보전하고 지하 주차장을 건설하자는 방안도 있지만 단기간에 제한된 예산으로 주차장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상주차장을 건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제천시내 한가운데 있는 중앙곡자. 제천시는 이곳에 45면 규모 주차장을 세울 예정이다 © 네이버 지도

이상천 제천시장은 지난달 24일 페이스북을 통해 “제천시에는 중앙곡자 외에도 1962년 이전 등록 건축물이 5,570건 존재한다”며 “모두 나름의 역사를 갖고 있으나 공적 보존 가치를 모두 인정받기는 어려운 여건”이라고 말했다. 제천시는 중앙곡자를 철거하는 대신 그곳에 있던 설비 일부를 제천한방바이오단지 국제발효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를 하고 있지만, 시민들과 전통누룩공장 보전운동단체는 중앙곡자 보전 촉구 서명을 확대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 제천한방바이오단지 발효박물관에는 중앙곡자의 일부 설비가 전시돼 있다. © 제천시

편집 : 김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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