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을 위한 심리치유센터 개소

“김제동 아저씨가 사준 ‘톤차임’이란 악기입니다. 소리는 아이들처럼 맑고 투명합니다.”

희선(13•여)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흰 티셔츠와 청바지를 맞춰 입고 옆에 선 정은, 은혜, 해림, 효영, 세민, 은결이도 긴장한 듯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지는 것을 신호로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의 멜로디가 맑고 투명하게 울려 퍼졌다.

 

▲ 방송인 김제동씨가 기증한 ‘톤차임’으로 연주하고 있는 아이들. ⓒ 최원석

30일 오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유공간 ‘와락’센터가 경기도 평택시 통복동에 문을 열었다. 후원자와 자원봉사자 등 400여 명이 참여한 개소식에서는 해고노동자 자녀들의 폰차임 연주와 북 난타 등 축하 공연이 열렸고,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이 가슴에 쌓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시간도 마련됐다. 참석자들은 젖은 눈가를 닦으며 와락센터의 출범을 축하했다.

'18번째 죽음' 막기 위해 곳곳에서 모여든 후원자들

지난 3월부터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의 심리치료를 맡아온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48•마인드 프리즘 대표)는 “논의를 시작한 지 다섯 달 만에 와락을 열게 된 건 기적”이라며 “말랑말랑한 힘이 세상에 얼마나 의미 있는지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끔찍하고 잔혹한 기억으로부터 도망하려 애쓰는 다른 쌍용차 노동자들을 찾아가 ‘18번째 죽음’을 막겠다고 다짐했다.

정박사는 ‘무럭무럭 자라라’ 장학금을 기부해서 종자돈을 만들어 준 고문피해자 모임 재단법인 ‘진실의 힘’과 5600여명의 후원자들, 공간설계와 인테리어 등을 맡은 재능기부자들과 심리치료를 도운 ‘레몬트리 공작단’ 등에게 각별한 감사를 표했다. 또 대청소를 도맡았던 ‘몸뚱아리’ 등 자원활동가들, ‘기적의 책꽂이’ 프로젝트로 1500권의 도서를 기증한 주간지 <시사인(IN)> 등에도 고맙다고 밝혔다. 이 센터 개설에는 약 2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쌍용자동차는 지난 2009년 구조조정을 이유로 노동자 159명을 해고했다. 희망퇴직자 2026명과 무급휴직자 461명까지, 사실상 2600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 과정에서 노조의 저항과 경찰의 강경진압 등 ‘쌍용차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해고의 충격과 생활고 등에 시달리다 쌍용차해고자와 가족 등 1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신동기 조직부장(35)은 “마음을 다스릴 만하면 또 한 분이 돌아가신다”며 “그럴 때면 다시 마음이  주저앉는다”고 안타까워했다.

해고노동자 고동민씨의 아내 이정아씨(38)는 “그동안 상담을 받으며 끔찍한 기억들을 내뱉어야 살 수 있다는 걸 알았고, 많이 홀가분해졌다”며 “숨어 있는 다른 쌍용차 가족들에게도 손을 내밀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의 교회 ‘은혜공동체’에서 온 이혜원씨(29•디자이너)는 “오늘 행사가 참 감동적”이라며 “쌍용차 문제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회를 위한) 희망버스는 국가가 너무 책임지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오픈행사를 축하하고자 찾아온 사람들로 ‘와락도서관’이 꽉 찼다.  ⓒ 최원석

같은 교회를 다니는 나세은(30•직장인)씨도 “와락이 아이들에게 놀이공간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치유 받았으면 한다”며 “쌍용차 파업 당시 노동자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아 안타까웠는데 (파업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하는) 언론보도가 바뀌고 학교에서도 노동권에 대해 잘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은 강용주 아나파의원 원장이 준비한 독감 예방접종 주사도 맞았다. 와락센터는 앞으로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심리상담 등을 계속하면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직접 운영하는 ‘치유밥상’과 ‘와락야구단’ 등의 프로그램도 개설할 예정이다. 

 

▲ 권지영 와락센터 대표. ⓒ 최원석
-드디어 와락센터가 문을 열었다. 소감은?
“급하게 준비하느라 정신없었고, 앞으로는 진짜 일을 해야 하니 제대로 바쁠 것 같다. 그런데 보람되게 바쁠 것이다. 책임감이 무겁다. 도와주신 분들이 너무 많다. 대구, 서울, 일산, 분당 등 여러 곳에서 도움을 주셨고 오늘도 150명 예상했는데 400명가량 오셨다.”

-평택 지역 여론은 아직 차가운 것 같다.
“온도차가 있다. 평택시민이 더 차가운 게 사실인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쌍용차가 이전에 지역에 기여를 잘 하지 못한 것도 있고, 사측이 파업 때 노동자간의 갈등을 일부러 조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고는 이제 우리사회에서 흔한 일이다. 비정규직이 800만이고,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들이 계약직으로 일하는 경우도 많다. 해고는 이제 일상에 가깝다. 와락이 지역주민에게도 좋은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99%’끼리 싸우지 말고, 서로가 치유자가 되는 기운이 화선지 먹물처럼 지역에도 번져나갔으면 한다.

-다른 해고노동자들을 찾는 일에 주력할 것이라 했는데.
“마인드 프리즘에서 실태조사 재실시를 고민 중이다.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시급히 지원해야 할 분들을 찾아 나서려고 하는데 구체적인 방식과 시기는 아직 논의하지 않았지만 18번째 희생자를 막으려 한다. 지난 3~8월 상담을 받은 사람은 아내들을 포함해 25명이다. 2500명 넘는 해고자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숫자다. 어디선가 또 죽어갈 수 있다. 시청에서 평택에 거주하는 450명에게 우편으로 실태조사를 했지만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했다. 그만큼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다.

-평택시에서는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행복맞춤 일자리’라고 쌍용차 해고 조합원과 가족을 대상으로 공공근로를 지원해주고 있다. 우선 월 90만원은 벌고 있는데, 마음이 치유되어도 사실 삶의 조건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시와 국회의원들이 정치적으로 도와줬으면 한다. 정부, 최소한 경기도 차원에서 거시적인 압력이 가야 회사가 명쾌한 답을 내놓지 않을까 싶다.

-쌍용차의 지금 상황은?
“공장에서 일하는 ‘산 자’들의 심리도 어렵다고 들었다. 상하이 자동차가 인수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인도의 마힌드라에 매각되다보니 ‘먹튀’에 대한 두려움이 계속 있다고 한다. 주야 2교대로 돌아가던 공장이 주간만 움직인다고 한다. 남은 사람들도 또 다시 일자리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와락이 어떤 공간이 되길 바라는가.
“못나도, 잘나도 늘 내 편인 엄마가 사는 집, 말없이 따뜻한 밥을 지어 먹여주는 집 같은 곳이었으면 좋겠다. 와락에 놀러오는 조합원들에게 ‘엄마 집’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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