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기자/피디가 간다 ④ 세상의 표정

아빠 눈동자에 남아있는 트라우마

53세 아빠는 당신의 4살 때 장면을 기억한다. 낮잠을 자다 깼다.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묵 장사를 하러 나갔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 품에 안겨 어리광이나 부렸을 4살 아이는 공포에 빠졌다. 아빠는 그때 폐소 공포증이 생겼다. 텅 빈 집에서 홀로 깨어난 4살 아이가 느꼈을 공포를 나는 모른다. 하지만 아이 눈동자엔 고스란히 남았다. 아빠와 눈을 맞추는 상황은 보통 싸울 때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탓하며 원망의 눈빛을 주고받곤 했다. 눈을 부릅뜨며 나를 쏘아보는 아빠의 표정은 볼 때마다 무섭다. 

그런데 엄격하게만 봤던 아빠의 얼굴에서 엄마를 애타게 찾는 가녀린 눈동자를 보았다. 어린 시절을 떠올린 눈에는 눈물이 점점 차올랐다. 아빠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내 뒤통수 너머에 있는 것을 응시했다.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은 감정은 눈빛으로 나타난다. 직접 맞닥뜨렸던 그때 그 상황이 다시 눈 앞에 펼쳐진 듯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빛이 된다.

▲ 아이의 눈은 감정을 그대로 기록한다. 어린 시절 겪은 공포와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고 눈빛에 나타난다. ⓒ Unsplash

TV 속에서 만난 얼굴과 표정

중학교 3학년 때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빈집을 혼자 지켜야 했다. 맞벌이 부모님과 고등학생 오빠를 둔 막내의 일상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형광등을 켜는 일은 늘 서러웠다. 초등학생 때는 부모님이 안 계시면 신이 나서 TV를 보았는데 중학생 때는 달랐다. 누군가와 마주 보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싶었다. 벽에 대고 할 수는 없으니 TV를 틀었다. 가수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즐겨봤다. 카메라는 가수의 얼굴을 최대한 크게 잡았다. 가수는 춤 연습을 하다 혼나면 눈을 아래로 깔고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맛있는 걸 먹으면 얼굴의 모든 근육을 끌어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길을 가다 갑자기 넘어질 땐 양 눈썹이 갈매기 모양이 됐다. 한 사람의 다양한 표정을 계속 보니 그와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하교 후 만난 TV 속 사람들은 가족의 귀가를 함께 기다리던 친구였다.

▲ 표정은 다 다르다. 표정은 분노, 슬픔, 아픔, 기쁨, 즐거움 등 내면의 감정을 드러낸다.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표정 뒤에 가려진 마음을 읽어야 한다. ⓒ Pixabay

친하게 지내면 몰라도 될 사실을 알게 되는 법. TV 속 표정 대부분은 감정과 상관없이 바꿀 수 있는 가면과 같다는 걸 깨달았다. 토크쇼에 나온 연예인들은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표정을 잘 지었다. 댄스 가수가 개인기로 춤을 추면 놀랍다는 듯 입을 위아래로 최대한 크게 벌리고 몇 초간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돌은 유행하는 애교 동작을 만화 주인공처럼 해냈다. 금세 눈을 깜빡이고 볼을 부풀렸다. 예능인은 듣기 거북한 농담을 들어도 웃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입꼬리를 잽싸게 올렸다. 방송에서 연예인의 무표정한 모습이 잡히면 다음 날 포털에는 태도 논란 기사가 떴다. TV 속 표정은 감정의 산물보다 상황에 맞는 도구에 가까웠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TV와 멀어졌다. 기숙학교에서 입시에 매달렸다.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할 때 친구의 표정은 TV에서 보는 표정과 달랐다. 급격한 표정 변화도 없고 상황에 알맞은 표정도 아니었다. 울어야 할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거나 놀랄 일을 무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읽기 어려웠다. 상대방이 어떤 단어를 쓰는지 유심히 들으며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야 했다.

하루는 짝꿍과 가족 이야기를 했다. 나는 완벽주의자인 친오빠 에피소드를 말했다. 친구는 겸연쩍게 웃으며 싱거운 반응을 보였다. 오기가 생겼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친오빠의 정보를 읊었다. 기숙학교에 다니고, 농구를 좋아하고, 과학을 잘한다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짝꿍의 입꼬리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낯빛엔 불편함이 역력했다. 친구가 오빠를 잃은 아픔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때 배웠다, 표정은 현재의 감정만이 아니라 과거부터 켜켜이 쌓인 상대방의 이야기라는 것을. 상황에 즉각 반응하는 표정만 있는 게 아니라 자기 경험을 곱씹어 소화한 뒤 짓게 되는 표정이 있다는 것을. 이러한 표정은 가면보다 진심에 가깝다는 것을.

▲ 아래로 내려간 눈썹, 살짝 찡그린 미간, 꽉 다문 입술… 얼굴의 전 부분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모여서 표정을 만든다. ⓒ Pixabay

내가 만난 세상 사람들의 표정

성인이 된 뒤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표정을 살폈다. 프랜차이즈 식당 젊은 알바생의 미소는 꾸며낸 것인데 자연스럽다. 손님이 무엇을 시킬지 궁금해하는 눈빛. 주문한 메뉴를 다시 확인할 때 살짝 들썩거리는 눈썹. 모두 훈련된 친절한 표정이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손님에게도 정해진 표정을 짓는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누르느라 얼굴은 시뻘게졌지만 고객의 불만에 경청한다는 표정은 잃지 않는다.

동네 택배노동자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1t 트럭에 잔뜩 쌓인 상자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분류한다. 오늘 안에 끝내야 한다는 압박이 얼굴 근육을 정지시킨다. 무거운 짐을 들고 빠르게 뛰어갈 때 미간이 좁혀지고 입술을 모아 거친 숨을 내쉰다. 도서관 옆 분식집 사장은 당근을 볶을 때 발그레하게 올라오는 주황빛이 아름답다며 수줍게 웃는다. 몇 달 뒤 사장은 미소를 잃었다. 재개발로 분식집을 갑자기 내놓아야 했고 당신은 더 이상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닌 것 같다며 속상함을 넘어 모든 걸 내려놓은 허망한 표정을 짓는다.

▲ KBS 비정규직 청소노동자가 처우개선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삭발식에서 동료의 머리를 깎고 있다. 일그러진 노동자의 얼굴에는 청소노동자의 슬픔과 아픔이 녹아 있다. ⓒ KBS

뉴스 속 정치인은 불같이 화를 낸다. 네가 틀리네 내가 맞네 고래고래 소리칠 땐 이마에 주름이 다섯 줄씩 생긴다. 이기고 주목받겠다는 집념은 맹렬한 분노로 나타난다. 분노를 노출시키는 데 적극적이다. 고 김용균 노동자 어머니 김미숙 씨는 뉴스 스튜디오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아들의 노동 현장을 직접 다녀온 소감과 아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설명할 때도 눈을 질끈 감거나 물을 마시며 눈물을 삼킨다. 아들이 겪은 참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어머니의 최선이다.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느라 힘들어하는 눈빛은 참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을 전한다. KBS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는 뼈가 부러져도 병가 없이 일해야 하는 노동환경을 고발하며 설움과 분노의 눈물을 참지 못한다. 속 시원히 울지도 못한다. 미간을 찌푸려 복받치는 감정을 힘껏 누르고 준비한 발언을 끝까지 읽는다.

▲ 고 김용균 노동자 어머니 김미숙 씨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작업환경을 설명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표정은 비통하지만 결기에 가득했다. ⓒ KBS

세상의 표정을 읽고, 세상에 전하겠다

표정은 하나의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4살 때 겪은 공포를 50대가 될 때까지 몇 번이나 곱씹고 다독였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를 울지 않고 이야기하기 위해 홀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감히 예측할 수 없다. 부러진 뼈를 이끌고 노동 현장에 나가야 했던 설움을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삶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가 어떠할지 표정을 보며 짐작할 뿐이다. 

PD는 짐작에 그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감추고 억누른 감정을 살펴서 내 것으로 만들고, 글과 영상으로 그려내서 사회의 아픈 곳을 드러내야 한다. 수많은 시민이 마음과 다른 표정을 짓고 살아간다. 말하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때로는 감추기도 한다. 마음은 표정을 비집고 눈빛으로 나타난다. 드러난 슬픔과 분노만이 아니라 드러내지 못하는 슬픔과 분노를 주목해야 한다. 세상을, 사람을 표정으로 읽어내는 일, 4살 아빠의 공포를 보듬어주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청년기자의 시선] 시즌2를 시작한다. 시즌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즌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기자/피디가 간다’이다. 언론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언론이 오늘의 세상과 우리 삶을 제대로 기록해 사회적 어젠다를 제기해야 하지만, 진영과 이익 논리에 빠져 ‘기레기’에서 ‘기더기’까지 전락했다. 언론이 바로 서지 못하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참 기자/피디를 열망하는 언론학도가 세상에 외친다, 이 땅의 건강한 저널리즘을. (편집자)

편집: 김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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