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불공정’

▲ 윤상은 기자

몇 년 전부터 고등학교에서 소논문 대회가 사라졌다고 한다. 학생이 관심 분야에서 스스로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는 대회인데, 대입 학생부종합전형에서 분별력을 보여주는 요소로 활용됐다. 하지만 학생의 수상 실적이 부모의 학력과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비판을 받아 점점 자취를 감췄다. 자녀의 소논문 작성을 도와주기 위해 돈과 지위를 이용하는 부모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학생부종합전형 컨설팅을 하던 지인은 학생의 소논문을 대리 작성해 교내 수상실적을 만들어줬다. 대입 스펙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해주며 받은 돈이 너무 많아 놀랐다. 시골 동네 보습학원을 다니며 학창시절을 보낸 내게는 거액의 학원비였다.

입시 컨설턴트를 찾아간 부모는 왜 자녀의 교내 활동에 유별난 관심을 보인 걸까? 고교시절 친한 친구가 해준 충고가 생각난다. 나는 쉬는 시간에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푸는 친구들 사이에서 눈치 없이 떠들다가 ‘수포자’가 됐다. 그 친구는 “이렇게 공부 안 하면 좋은 대학 못 가고, 대학 못 가면 좋은 직장도 없다”며 걱정했다. 그와 부모의 걱정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면 생애 단계마다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현실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 경쟁은 교내 소논문 대회가 없어진 이유처럼 불공정을 담고 있다.

▲ 대학수학능력시험이 50일 앞으로 다가온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종로학원 강남본원에서 수험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불공정은 능력주의를 등에 업고 유지된다. <세습 중산층 사회>를 쓴 조귀동은 20대의 계급 격차가 능력에 따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부모에게 받은 물적∙인적 자본 차이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자녀 교육은 부모가 물려줄 수 있는 인적 자본이다. 코로나19가 유행해 학교에서 비대면 수업을 하자 인적 자본 격차가 더 드러났다. 지난 6월 고등학생이 치른 모의평가에서 국어, 수학, 영어 과목에서 90점 이상과 40점 미만을 받은 비율이 함께 늘어났다. 학교 교육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성적 중위권 학생이 줄어든 것이다. 돈 있는 부모는 학교 교육의 공백을 사교육으로 메웠지만, 돈 없는 부모는 “그래도 열심히 하라”는 말만 되뇔 수밖에 없었을 거다. 부모의 지원은 가정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그 격차를 메워줄 공교육과 복지 혜택이 부족하다. 학벌을 포함한 인적 자본의 대물림은 진정한 능력주의에도 어긋난다.

계급을 대물림하는 또 다른 수단은 물적 자본이다. 2016년에는 최순실 씨 딸이 “돈도 실력”이라는 말을 해 공분을 샀다. 돈이 본인의 실력일 리는 없지만, 실력을 쌓는 조건을 제공한다. 국세청은 2018년에 2030이 물려받은 주택과 빌딩이 3조원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는 최근 5년간 제일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산의 큰 부분이 주택으로 형성된다. 부모가 만들어준 물적 자산이 자녀에게 든든한 배경이 된다. 토마 피케티는 이를 두고 ‘21세기 세습자본주의’라 말했다. 윗세대에게 받은 자본이 본인이 스스로 노력해서 일군 것보다 클 때 불평등이 확대된다는 지적이다.

우리는 능력주의라는 ‘야만의 정글’ 속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야만은 사회진화론으로 정당화했다. 당시 사회진화론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국제관계에 적용해 약육강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친일인사들이 일제의 야만에 부역한 명분이기도 하다.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국제관계에서 열등한 우리 민족이 경쟁에서 진 건 당연한 결과라며 열등한 우리 민족을 개조하자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는 능력주의를 선망하며 무한경쟁에 따른 불평등을 방치한다는 점에서 사회진화론 신봉자들과 닮았다. 약자가 도태돼야 사회가 진보한다고 믿은 100년 전 사람들처럼 출발선이 달라서 뒤처진 사람들을 외면한다. 청년 세대가 시대정신처럼 말하는 ‘공정’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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