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2단계 거리두기'

▲ 이나경 기자

시력교정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수술에 앞서 내 눈 상태가 어떤지, 수술하기에 무리는 없는지 등을 미리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각막의 상태를 정밀하게 살펴보기 위해 동공을 일시적으로 확장하는 안약을 눈에 넣어야 했다. 검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안약 때문에 반나절 정도는 동공이 평상시보다 확대되어 가까이 있는 것들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주의사항을 듣기는 했다. 막상 밖에 나오니 거리의 풍경과 사물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잘 보였다. 그렇게 강남에서 우리 집까지 한 시간쯤 걸리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이미 사람이 꽉 찬 버스 안, 통로에 서서 익숙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휴대폰 액정이 뿌옇게 보이는 게 아닌가.

순간 식은 땀이 나고 무척이나 당황했다. 평일 저녁, 사람 가득 찬 강남의 버스 안에 사람들은 각자 세상에 빠져 있었다. 모두가 자기 세상에 빠져 있는 그때 나는 순간 홀로 우주 속에 담겨 있는 듯했다. 강남은 내게 익숙한 곳이 아니다. 그곳 지리를 잘 모르는 내가 한 시간이나 걸리는 버스를 탄 것이다. 방향이 맞는지, 어디서 내려야 할지 순간 헷갈렸고 공포가 밀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올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이제는 사람들이, 주위가, 바깥 풍경이 잘 보였다. 안정이 찾아오자 순간 감상에 젖어 들었다. “나경아, 여기 와서 이것 좀 읽어봐.” 엄마는 이따금 나를 불러 무언가를 읽게 만들었다. 요리할 때 양념통의 조그마한 글씨나 화장품 포장지의 깨알처럼 작은 설명문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귀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 이거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 찍고 확대해서 보면 잘 보여.” 

▲ 자동차의 옆 거울(사이드미러) 속 흰색 차량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 flickr

엄마에게 직접 글씨를 읽어주는 것이 귀찮아 때로는 “이게 더 편할 거야”라고 핑계를 대며 휴대폰에 책임을 떠넘겼다. 엄마는 신문을 볼 때 눈 가까이 당겨보다가 멀리 떨어뜨려 보다가, 돋보기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그랬다. 나에게 엄마의 모습은 무언가를 썼다 벗었다, 가까이했다 멀리했다 하는 반복 행동을 관찰한 게 전부였다. 엄마가 얼마나 답답하고 귀찮았을지 나는 몰랐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내가 시력교정수술을 하기로 마음먹기 한두 달 전, 엄마가 먼저 눈수술을 했다. 노안교정수술이었다. 그때 나를 부끄러워한다. 엄마에게 꼭 수술이 필요한가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안경을 쓰고, 엄마는 안 쓴다는 이유로. 나의 시력은 마이너스고 엄마는 그렇지 않다는 이유로. 엄마가 가진 불편함을,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일상의 불편함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도 노력하지 않았다.

꽤 며칠 동안 검진 날의 일을 생각했다. 그날 버스에서 찰나의 순간, 나의 공포심과 이후에 이어진 답답함, 그리고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불편했을지에 관해 까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수술을 마치고 안경 없이도 세상을 편히 볼 수 있다는 즐거움에 빠져 그날 일은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이제는 나도, 엄마도 보다 편하게 무언가를 볼 수 있다. 왜 우리는 사람이, 사물이, 누군가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까? 어쩌면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때로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자동차 옆 거울에 써놓은 말인데, 사람도 보기보다 가까이 있는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급속확산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늘(23일)부터 2단계로 강화된다. 거리두기가 자칫 소원한 인간관계로 귀결돼서는 안 될 것이다. 거리두기 시대에도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려면 남의 처지에 서 보면 된다. 그가 훨씬 가깝게 느껴질 테니까. 


한국이 극심한 갈등사회가 된 것은 자기만 이롭게 하려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발상에 너무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좌우, 여야, 노사, 세대, 계층, 지역, 환경 등 서로 간 갈등 국면에는 대개 인간, 특히 강자나 기득권층의 자기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간이 넓어져야 할 때입니다. 그런 생각과 풍자가 떠오르는 이는 누구나 글을 보내주세요. 첨삭하고 때로는 내 생각을 보태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봉수 교수)

편집 : 이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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