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믿음과 이성의 조화

▲ 오동욱 PD

신부님의 눈물은 연신 새로운 자국을 만들었다. 가브리엘 신부님의 얼굴은 코로나19 때문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유튜브 화면 너머, 그는 터지는 울음을 삼키며 “제발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신도들을 설득했다.

“지금 내 눈물에는, 손에는, 숨에는 바이러스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많이 알려진 의학 지식으로 신도들의 ‘안전’을 꾀했다. 그의 성사는 특별했다.

“하느님은 일반적으로 성사를 통해 임하시지만, 가장 거룩한 순간에는 직접 임하십니다. 우리에게 임하실 하느님을 믿고 기다립시다.” 

▲ 스페인 본당의 가브리엘 신부는 자신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밝히며 교인들에게 교회에 나오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다. © Parroquia San Vicente de Paúl de Valdemoro 유튜브

그의 메시지에는 믿음에 근거한 ‘안심’도 있었다. 그는 믿음과 이성, 두 정신을 무기 삼아 ‘안전’과 ‘안심’을 꾀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이상한 일처럼 보였다. 나는 살면서 믿음이 이성과 가깝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갖지 못했다. 나에게는 오히려 믿음이 이성에게 ‘악마’라고 하고, 이성이 믿음에 ‘꼴통’이라 하는 게 자연스럽다.

생각해 보면, 믿음과 이성은 불가분의 관계일 수도 있다. ‘암흑의 시대’라 불린 서양 중세에도 믿음과 이성은 서로를 배척한 적이 별로 없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표현이 있다. 그 때문인지 한국에선 종종 서양 중세를 이성 활동이 멈춘 시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녀는 주요 인사를 보필하는 직종으로, 왕의 시녀는 귀족 이상의 신분만이 가능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수석 시녀도 공작부인이었다. 중세의 신은 세계의 목적, 즉 세계관 그 자체였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표현은 학문 지칭 대명사로서 철학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란 뜻이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믿음은 이성 덕분에 더 쉽게 인도된다”고 했다. 

나는 왜 믿음과 이성이 서로 배척한다고 생각했을까? 한 가지 추측은 내 얄팍한 종교적 믿음이 아직 변화된 세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이 우리 세계관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과학 혁명만 그럴까? 모든 혁명은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왕정을 뒤엎은 프랑스혁명도, 레닌과 마오쩌둥의 공산당혁명도, 한국의 촛불혁명도 세계관을 바꿨다. 그 과정에도 종교는 살아남았다. 변화된 세계관에 맞춰 없앨 건 없애고, 보존할 것은 보존하는 적응이 있었던 덕분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로 정치에 관여하던 태도를 버리고, 사람들 마음에 안정과 위로를 채우는 일에 전념한 가톨릭처럼. 

역시 신에 관한 진실한 탐구, 신실함이 부족했던 게 문제였을까? 변화의 순간에 종교적 믿음이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신실함이 부족했다는 생각도 든다. 데카르트는 “명백해 보이는 수학의 원리도 악마에 의해 기만되지 않았다 믿을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다. 그는 과학도였지만,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과학 지식을 뒷받침할 학문 토대도 찾고 싶었지만, 신도 버릴 수 없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추구한 결과가 정신의 영역과 물질의 영역을 분리한 것이었다. 신실한 신자인 칸트도 믿음과 이성의 조화를 모색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의 활동을 명확히 규정했지만, 역으로 신에 관해 이성은 잘못된 추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성과 믿음. 두 개념이 서로를 배척하면 안전할 수 없거나, 안심할 수 없다. 믿음 없이는 안심할 수 없고, 이성 없이는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신부님과 그 신도들은 다행히 안전과 안심을 확보해 일상의 불안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컸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시피 한 종교적 믿음 때문에 불안하다. 기대고 있을 심리적 언덕이 얄팍하기 때문이다. 마음먹은 김에 종교에 기대볼까? 아차, 유튜브가 자동 추천 알고리즘으로 다음 종교 콘텐츠를 설정한다. 한국이다. 200명이 교회에서 예배중이란다. 음... 아무래도 당분간 안심보다는 안전을 택해야 할 것 같다.


편집 : 김현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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