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김성진 기자

눈에 밟히면 더 생각나는 법이다. 이용수 할머니는 회견할 동안 ‘어린 것들’에 대한 얘기를 유독 많이 했다. 지원금 사용처가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다 어린 것들이 돈을 어렵게 모았다는 얘기에서 출발했다. 집회에 온 청소년이 커가는 모습을 할머니는 30년 동안 봐왔다. 처음 온 친구가 떠난다. 그러면 또 다른 친구가 자리를 메우더라. 그 모습을 본 할머니는 일본 정부와 힘겹게 싸웠던 투쟁의 끝을 고민했을 것이다. 서로 등을 돌리는 것보다, 설령 이 할머니가 잊혀지더라도 한일 청소년이 마주 본 채 대화하는 모습을 더 즐거이 상상하지 않았을까. 사실 ‘성금을 제대로 쓰지 않는다’는 말이 너무도 자극적이어서 여론은 온통 그 한 문장에 집중했다. 어쩌면 할머니가 더 하고 싶었던 다른 한 가지 발언에 초점을 맞춰보자. 한일 양국 청소년의 교류가 훨씬 활발해야 한다. 미래 세대의 범국가적 연대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의 또 다른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일본 정부에 공식 사죄를 요구해 온 기존의 탑-다운식 접근이 이제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천 번 넘게 열었던 수요 집회, 또 이용수 할머니가 힘쓴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 다 일본 정부를 겨냥한 움직임이었다. 거듭된 노력에도 일본 정부가 답하지 않는 것은 일본 정부를 움직일 일본 내 여론이 이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017년 위안부 합의를 무효화했다. 조사해보니 그로 인해 일본 내에서 ‘한국은 바라는 수준이 높다’는 여론이 절반을 넘어 버렸다. 지금과 같은 여론이면 일본 정부가 사죄하는 게 매우 어렵지 않을까.

▲ 일본 대학생 천 2백여 명이 지난 1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만나 직접 사죄했다. Ⓒ KBS

한일 양국 청소년이 인간적인 수준에서 교류해야 하는 건 다 이 때문이다. 미래 세대를 직접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청소년 목소리는 기성 세대의 것보다 큰 함의를 갖는다. 기후위기 해결을 촉구한 열 다섯 살 그레타 툰베리를 유엔 정상회의에 세운 것은 청소년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기성 세대의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일 청소년은 블록화가 심해지는 국제 정세에서 한-일 관계를 이끌어갈 당사자들이다. 그들이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함께 알고 공감하는 게 당장 중요한 과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를 설득하는 요소로 로고스(이성)와 더불어 파토스(감성)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일 청소년이 객관적 사실에 더해 같은 목소리를 낼 때의 감동과 갈등 해소를 전하면 일본 정부에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것도 더 큰 당위성을 가질 수 있다.

일본 청소년이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공감할지가 관건이다. 일본 정부의 불의를 근거로 일본 국민 개개인까지 부도덕하다고 단정하는 건 무리가 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집단의 비도덕성을 근거로 개인까지 비난하지는 말라고 했다. 일본 정부와 뜻을 같이하는 극우 일본인도 있고, 반대로 일본 정부도 비판하는 ‘생각 있는 일본인’도 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친하게 지낸 일본인 여학생이 있다. 평소 모습이 다른 일본인과 별 다른게 없는 친구였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군성노예제 피해는 분명한 사실이고 일본 정부가 공식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 양국의 청소년이 더 교류해야 하는 건 공감이 바로 인간관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미래 세대가 공감할 때 앞으로의 정부는 공식적인 수준에서 진정한 사죄와 국가 배상까지 이룰 수 있다. 

문제 해결의 종지부는 역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치부를 들추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문제인데 하물며 위상을 지키려는 한 국가의 사죄를 받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노력이 필요할까. 지금 필요한 건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하는 살라미 전술이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공식 사과하자는 일본 내 여론을 형성하지 않으면 일본 정부에게는 사과할 유인이 따로 없다. 한-일 청소년이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할머니 발언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미래 세대가 먼저 역사 사실을 공유하게 하자. 일본 청소년이 이용수 ‘오바상’(일본어로 할머니를 가리키는 말)을 생각하게 하자. 한일 청소년이 마주 보고 할머니 진심을 얘기하는 그 때를 나는 기다린다.


편집 : 민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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