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여성정책연구원 ‘불법촬영물 대응에 관한 성인지적 분석’

▲ KBS가 2017년 방영했던 디지털 성폭력 범죄를 다룬 드라마 '마녀의 법정'의 한 장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피해 여성이 검사 앞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사귀던 남자친구가, 혹시 나 몰래 찍어둔 사진이 있을까봐 불안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 KBS

“처음에 가해자가 제 나체사진을 찍었다는 걸 알고 나서 경찰서에 갔는데, 경찰관들이 저에게 반말로 이것저것 물어봤어요. 제가 나이가 어려 보인다고 ‘왜 왔어’라며 반말을 하고, 제가 피해를 입은 사진을 다른 남자 경찰들까지 다 보는 걸 보고 너무 기분이 나빴어요.”

몰래카메라 범죄 피해 여성인 ㄱ(27) 씨는 경찰서에 피해자 조사를 받으러 갔다가 수치심을 크게 느끼는 2차 피해를 입었다. 수사 담당자가 피해자 진술을 하러 나온 자신의 피해 사진을 컴퓨터 화면에 띄워 놓고 다른 경찰관들이 다 보도록 해 또 한번 사진이 공개되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불법촬영물 대응에 관한 성인지적 분석’ 연구 결과를통해 “불법촬영물 유포 사건 피해자들이 수사 및 기소 과정에서 2차 가해를 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젠더폭력안전연구센터 장미혜 선임연구위원팀이 2019년 실시한 불법촬영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층면접조사에서 피해자들은 “경찰 조사 단계에서 (여성 피해자를 조사할) 수사 담당자를 별도로 배정하지 않고 남성 경찰관이 조사하거나 수사와 관계없는 질문을 하는 등 부당한 상황이 있었다”고 응답했다. 피해자들은 또 검찰 조사과정에서도 “검찰의 태도가 권위적이고 개방된 장소에서 조사해 촬영물이 노출되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공개된 장소에서 조사, 불법촬영물 2차 노출

조사에 응한 20대 여성 피해자 ㄴ 씨는 “수사와 상관없는 다른 경찰들까지 와서 영상과 사진을 구경하고 한마디씩 던지는 게 불쾌했다”며 “2차로 시선 강간을 당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공개적인 수사 환경에 관해 “영상을 찍힌 내 몸을 누구나 관찰하게 되는 이런 환경이 개선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수사 과정에서 수사 담당자가 ‘가해자를 왜 만났는지’, ‘그런 사람인지 알았는지’, ‘가해자와 과거 성관계를 가졌는지’ 등 성폭력 관련 수사와 관련 없는 내용까지 질문을 했다며 불쾌해 했다.

“가해자와 성관계를 한 경험이 있는지, 그런 가해자를 왜 만났는지 질문했어요. 경찰 조사에 꼭 필요한 질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설사 가해자와 성관계를 했다 하더라도 몰래 나체사진을 찍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성관계 여부가 범죄의 경중과 관계없다고 생각하는데 왜 묻는지 모르겠어요.” (피해자 ㄱ 씨)

피해자 ㄴ 씨는 “수사관이 가해자가 그런 사람인 걸 알았는지 질문했다”며 “애초에 가해자가 그런 사람인지 알았더라면 당연히 만남 자체를 가지지 않았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들을 설문조사한 결과 조사에 응한 피해자들은 경찰과 경찰수사에 관한 불신이 깊은 것으로 나타났다. ©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피해자 다움’이라는 인식

이런 피해자들 불만에 관해 연구원 면접 조사에 응한 성폭력 수사관들은 “동영상 촬영 경위에 관한 질문은 정확한 피해 정황을 파악하고 ‘진정성 없는 피해자’를 가려내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40대 여성 ㄷ 수사관은 “‘어떻게 하다가 찍게 됐냐? 찍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냐? 자발적으로 찍은 것은 아니냐?’고 물어봐야 하는 게 있다”며 “가해자가 억울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먼저 피해자를 조사한 뒤  피의자를 조사해서 서로 주장이 다르면 피해자 조사를 더 하고 결론을 내는 건데... 정황이 다르면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피해자가 이의를 제기하죠. 내가 피해자고, 내가 피해를 입었는데 왜 나한테 뭐라 하냐고 하죠.” (50대 남성 ㄹ 수사관)

장 선임연구위원은 연구보고서에서 “수사관들은 피해자가 허위로 피해 사실을 신고해 무고죄로 처벌받은 경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민원을 제기하는 일을 겪기도 한다”며 “이 때문에 수사관들이 피해자를 대할 때 피해자의 성향과 피해의 진정성 여부를 우선적으로 확인하려는 태도가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장 연구위원은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란 수사 목적상 피해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과거 일부 사건에서 비롯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진정성을 기준으로 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자칫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로 흐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피해자 다움’이라는 인식의 덫에 갇힐 위험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형사조정위원이 피해자 폄하, 화해 강요까지

연구보고서는 “형사조정위원이 조정제도에 관해 피해자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거나 피해자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조정 절차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형사조정제도는 사건 당사자인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삼자인 형사조정위원이 중개해 쌍방의 주장을 절충하여 화해하도록 도와주는 제도다. 형사조정위원이 낸 조정안을 사건 당사자들이 받아들이면 화해가 이뤄지지만, 조정안이 갖는 법적 구속력은 없어 당사자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아도 된다.

보고서는 또 “조정위원들이 불법촬영물과 같은 디지털 성폭력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어 오히려 피해자들을 폄하하고 화해를 강요하는 등 2차 가해를 하는 사례들이 있다”고 밝혔다. 성인지 감수성이 없는 조정위원들 때문에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당하는 일이 일어 난다는 것이다.

▲ 2018년 제작된 KBS 인터뷰 전문 영상 콘텐츠 '듣다'의 '성폭력 수사 기관입니까? 가해 기관 입니까?'편. 한국여성민우회에 따르면 경찰관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그게 무슨 성폭력이에요. 성추행도 안되겠다", "가해자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던데 그냥 합의하고 끝내"라며 가해자와의 합의를 종용한 사례가 있었다. ⓒ KBS

“가해자의 연락과 합의 시도가 2차 가해로 느껴져”

연구원 심층면접에서 피해자들은 “지속적인 가해자의 연락과 합의 시도 자체를 2차 피해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피해자 ㄴ 씨는 “가해자가 합의하고 싶어서 계속 연락을 해 오면 평소에 잠시 잊고 있다가 다시 생각나 기분이 나빠진다”고 말했다. 피해자 ㄱ 씨는 “가해자가 한참 시간이 지나 연락이 왔는데 전화 통화를 한 건 아니지만 전화가 온 그 자체로도 무서웠다”고 말했다.

디지털 성폭력 수사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고, 이루어진 경우 대부분 합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원은 피해자들이 합의를 하게 된 동기는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와 용서 때문이라기보다는, 합의하지 않았을 때 불편한 상황과 가해자가 지인인 경우 주변인들 관계 등 외적 요인 때문이라고 밝혔다.

수사 기소 담당자 ‘성인지 감수성 결여’로 2차 가해

연구원은 불법촬영 수사과정에서 2차 피해가 일어나는 주원인은 수사관의 성인지 감수성 결여라고 지적했다. 경찰청은 지난해부터 승진 예정자들에 대한 성평등 교육 시간을 확대하고 관서별 계·팀장 이상에게 별도 성평등 교육을 신설했다. 장미혜 위원은 “교육이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에 그쳐서는 안 되고, 수사 현장을 고려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성인지 교육 또는 성평등 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인지적 관점이 직무 전반에 걸쳐 골고루 반영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성인지 교육에 불법촬영의 본질과 발생 원인을 성인지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강화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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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김현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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