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장은미 기자

보복성 음란물을 뜻하는 ‘리벤지 포르노’가 몇 년 전 불법사이트 ‘소라넷’에서 한창 유통됐을 때, ‘옛날 여자 친구를 그런 영상에서 봤다’고 노래한 가수가 있었다. 그가 본 것은 헤어진 애인의 알몸이나 성관계 영상 등을 상대 남자가 몰래 인터넷에 올린 것, 즉 ‘디지털 성범죄물’이었다. 그걸 버젓이 가사로 쓴 그에게 여성들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정작 그의 첫 반응은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범죄의 산물’을 보고 신고하는 대신, 그걸 구매해 즐기고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오히려 범죄자 대신 피해자를 공격하는 무리도 있다. 이번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 관련 기사에도 ‘선량한 피해자는 아니다’ 등의 댓글이 달렸고 ‘내 딸이 그 피해자라면 내 딸의 행동과 내 교육을 반성하겠다’는 망언도 나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와 포토라인 세우기’를 요구한 청와대 국민청원은 일주일 만에 역대 최다인 260만 명 참여를 기록했다. ‘박사’로 불린 조주빈(24)과 ‘갓갓’ ‘와치맨’ 등 텔레그램 비밀방 운영자들이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유인하고 협박해서 엽기적 영상을 찍고 성폭행과 학대를 일삼았는데, 그걸 ‘돈 내고 즐긴’ 자들이 단순 합산으로 26만여 명이라니 당연한 반응이다. 지방 중소도시 인구와 맞먹는 숫자를 보면서, ‘내 주변엔 이용자가 없을까’ 하는 의심에 두려움과 비관마저 밀려든다.

▲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에서 민중당 관계자들이 ‘텔레그램 n번방’입장자에 대한 전원처벌과 성착취 종식을 위한 긴급 정당연설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한 당원은 “악마가 저지른 비일상적이고 특이한 범죄가 아닌 분명한 성범죄, 성착취 사건”이라고 말했다. ⓒ 민중당

이런 범죄를 뿌리 뽑고 막으라고 우리는 법과 제도를 두었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 법과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밥값을 못하고 있다. 아주 형편없이. 지난해 말 텔레그램 성범죄가 보도되고 국회 국민동의청원 1호로 채택되자 지난 3일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원회가 열렸다.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김오수(57) 법무부 차관은 “청소년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을 자주 한다”고 했고, 김인겸(57) 법원행정처 차장은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점식(55) 미래통합당 의원은 “자기만족을 위해 영상을 만드는 것까지 처벌해야 하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필요한 처벌 강화안은 당연히 법에 반영되지 못했다. 이들은 나중에 ‘딥페이크(특정인의 얼굴을 음란물과 합성한 영상) 제작·소지에 대한 논의였다’고 해명했지만, 10만 명의 청원으로 발의된 법안의 배경과 취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50대 관료와 의원들’ 때문에 젊은 여성들은 법의 보호를 받을 기회를 잃었다.

법과 제도를 좌우하는 사람들이 이번 사건에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이번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더 심한 범죄가 또 벌어질 것’이란 점이다. n번방으로 통칭되는 디지털 성착취 이전에 ‘양진호가 웹하드를 통해 유통한 불법동영상’ ‘손모 씨가 다크웹에서 유통한 세계적 아동음란물’ ‘가수 정준영 등이 연루된 버닝썬 게이트의 불법촬영물’이 있었다. 이들 사건에서 제작자는 물론 이용자까지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면 n번방은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손모 씨는 약 3년간 아동음란물 등 22만 건을 유통하고 4억 원의 이득을 챙긴 주범이지만 국내 재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을 뿐이다. 반면 지난해 미국 텍사스주에서는 아동음란물에 한번 접속하고 한번 내려받기한 ‘이용자’가 징역 5년 10개월과 보호관찰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우리도 이렇게 주범은 물론 사실상 공범인 이용자까지 무거운 처벌을 받게 해야 디지털 성범죄의 싹을 자를 수 있다.

지난 23일 국회 청원사이트에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비롯한 사이버 성범죄의 처벌법 제정’ 청원이 다시 올라온 후 순식간에 참여자 10만 명을 넘어서자 25일 법제사법위원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에 각각 안건이 회부됐다. 이번 기회도 날린다면 의원들은 국민들의 분노와 ‘척결’의 칼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동ㆍ청소년 대상 음란물·성범죄에 벌금형과 집행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이 80%에 육박하는 기막힌 현실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동시에 범죄성 음란물의 ‘이용자’ 혹은 ‘가입자’에 대해서도 형사처벌과 신원공개를 강제하는 법안이 나와야 한다. 성범죄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처벌하는 조항도 추가되어야 한다. n번방 사건에 분노하는 수천만의 시선이 국회를 지켜보고 있다.


편집 : 이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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