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너라 벗고놀자] 황상호-우세린 부부 여행기 ⑭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는 활성화한 마그마의 작용으로 온천이 발달해 있다. 온천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신성시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온천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인 정착민이 원주민의 온천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 주변에 온천 리조트를 지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전현직 기자 부부가 이 지역 무료 자연 온천을 다니며 썼다.

스누피 그림이 단서다. 캘리포니아 중남부 자연 온천을 샅샅이 뒤지겠다는 각오로 온갖 자료를 인터넷에서 뒤지다 어느 온천 정보가 튀어나왔다. 이건 아내가 건진 거다. LA 한인 라디오 방송국 홈페이지 애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사연이었는데, 캘리포니아 컨카운티 컨강 하류에 한인 노부부가 운영하는 온천이 있다는 것이었다. 고향집 같은 분위기에 물도 끝내준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장소 설명이 없었다. 구글 지도에 점 하나 찍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곤 온천 입구에 스누피 그림이 그려 있다고 설명했다. ’스누피라… 거참.’ 이번에는 내가 찾은 정보로 조각을 맞춰봤다. 컨강 주변 유명 온천 가운데 아무리 영어로 검색해도 최근 소식을 알 수 없던 곳이 있었다. 왕년에 이름 짜했던 델로네가 온천(Delonegha Hot Springs)이었다. ‘설마, 거가 건가?’

델로네가 온천에서 온천수가 흐르고 있다. © 황상호
델로네가 온천에서 온천수가 흐르고 있다. © 황상호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글 지도에 델로네가 온천을 찍고 달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330km, 차로 3시간 거리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차는 협곡의 목젖을 파고들었다. 바위로 쌓아올려진 마천루에 마천루가 이어졌다. 언제 돌덩어리가 차량 지붕에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저 둥근 바위를 보며 윤회를 생각했다고 한다. 아득히 먼 절벽에서는 캘리포니아주 대표 꽃인 주황색 파피꽃이 융단처럼 깔리고 있었다.

곧 목적지다. 178번 캘리포니아주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수력발전소가 보이고 아래는 컨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구글이 점지한 곳에 도착. 하지만 온천으로 진입할만한 도로도 인도도 안내판도 없었다. 일반 차도라 뒤따라오는 차량 때문에 정차해 있기도 위험했다. 결국 차를 돌렸다. 가까운 레밍턴 온천과 미라클 온천에 가기로 했다.

산속에서 찾은 스누피와 태극기

두 온천에 들리고 난 뒤, 집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렇게 20여 분 달리다 문득 전두엽에서 장면 하나가 반짝 떠올랐다. 스누피? 아니, 그의 친구 우드스탁! 델로네가를 포기하고 레밍턴 온천에 가기 위해 산길인 컨 캐년 로드(Kern Canyon Rd)를 지났을 때, 어디선가 바위에 스누피 친구인 노란새 우드스탁이 그려있던 것 같았다. 추정이었다. 진짜 봤는지, 상상한 건지 헷갈렸다. 차를 돌려 컨 캐년 로드를 수색했다. 그렇게 십여 분 살피다, ‘그래, 내가 뭘 잘못 본 거지’ 하고 푸념할 때쯤 스누피와 우드스탁이 눈에 들어왔다. 황톳빛 바위에 선명히 그려있었다. 바로 옆, 녹슨 철문 아래에는 손바닥만 한 태극기가 팔랑이고 있었다. 

▲ 온천장 주인 아들이 그린 스누피와 우드스탁. © 황상호

이 오지에 방탄소년단 팬이 아니고서야 타인종이 대문에 태극기를 꽂아둘 일 없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조금 지나자 언덕 중간에 레저차 한 대가 보였다. 작은 개 두 마리가 맹렬히 짖었다. 스누피 같은 비글과는 전혀 다른 전형적인 한국형 똥개였다. 아내는 왈왈거리는 개 짖는 소리에 놀라 뒷걸음질했다. 더 걸어 내려가니 한글로 ‘온천’이라고 쓰인 작은 안내판이 길바닥에 꽂혀 있었다. 옳다구나! 이곳이로구나!

강 너머에는 천막 여러 개가 둘러쳐진 시설물이 보였다. 어릴 적 계곡에서 닭백숙과 파전, 오리고기를 팔던 가든식당 모습이었다. 그곳에서는 붉은 개가 짖지 않고 멀뚱히 우리를 바라봤다. 아까 사납게 짓던 타미와 수지의 이모, 세나였다. 여사장님도 개 짖는 소리에 나와 있었다.

거기 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면 돼요!”

사장님이 알려준 대로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배는 쇠줄로 연결돼 있었다. 줄을 당기자 배는 온천으로 흘러갔다. 출입로와 온천 사이 흐르는 강이 컨강이다. 봄 가을에는 잔잔하지만 눈 녹는 6월이 되면, 그야말로 놀란 황소처럼 널뛰듯 물이 불어난다. 온천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윤선 사장님이 분홍색 꽃무늬 파자마를 입고 우리를 반겼다.

▲ 언덕에서 내려다본 온천장 조감. © 황상호

마약과 섹스로 오염된 온천

온천장 주인인 윤선 씨와 남편 윤완모 씨가 이곳에 눈독을 들인 건 1990년대 초반이다.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 건축업을 하던 완모 씨는 입소문을 듣고 이곳에 자주 놀러 왔다. 고즈넉한 경치에 온천수도 뜨끈하니 금상첨화였다. 시간만 나면 아내를 꾀어 놀러 오던 그는 어느 날 언덕에서 말끔한 옷차림을 한 남성 셋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1977년 미국으로 이민하기 전 입시 영어 강사를 했던 완모 씨는 그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내용인즉슨, 온천에서 마약 사용과 성행위가 빈번해 주민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컨카운티 민원 부서 공무원이었다. 그날 완모 씨는 온천이 사유지라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는 공무원에게 온천을 사서 깨끗하게 관리하겠다며 온천 주인의 연락처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94년도쯤이었다. 땅 주인은 말리부에 사는 90대 할머니였다. 외부와 차단된 저택에서 개인 경비원을 둔 부자였다.

윤씨 부부는 할머니 집으로 무작정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고 온천을 팔라고 설득했다. 할머니는 힘들게 살 때 모은 돈으로 산 것이라며 거절했다. 하지만 부부는 집요하게 집을 찾아갔다. 윤선 씨는 “영감이 할머니를 살살 꼬셨지. 결국 땅 임대계약을 했어. 남편이 서류 작업을 다 해서 할머니가 사인만 할 수 있도록 했지.” 

부부는 매월 초 주인에게 임대료를 직접 갖다줬다. 날짜를 꼭 지켰다. 그렇게 1년 동안 돈을 지불하며 온천을 팔라고 설득했다. 결국 96년 6월 말리부 할머니는 부부에게 온천을 양도했다.

우격다짐으로 개발한 온천

부부는 10년 동안 이곳을 개발했다. 초창기, 방문객이 무분별하게 들어와 돌 틈, 풀숲 사이 쓰레기를 박아 두었고 사람 분변도 지뢰처럼 숨어 있었다. 부부는 먼저 한 사람당 입욕료를 5달러씩 받았다. 동시에 공사를 시작했다. 당시 온천에는 탕이 두 개였다. 바위틈에서 솟는 용천수를 모래주머니나 바위로 막아둔 정도였다. 탕도 유황 성분과 바닥 모래가 뒤섞여 탁하고 냄새가 났다.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완모 씨가 솜씨를 발휘했다. 아내와 두 아들, 남미 출신 일꾼을 데리고 시간 날 때마다 이곳에 와 공사를 했다. 타일 공장에서 깨진 타일을 공짜로 얻어와 바닥에 깔고 콘크리트로 주변을 구획해 탕 개수를 늘렸다. 강 수위가 높아져도 온천이 쓸려나가지 않도록 강변에 흙과 바위를 쌓아 올려 옹벽을 만들었다. 완모 씨는 "내가 건설업을 해봐서 알아. 온천도 그냥 만들면 돼. 들이닥쳐 하면 다 된다니까"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선녀탕'이라고 부른다.

굴삭기도 경매로 사 와 직접 산길을 넓혔다. 마차가 다니던 좁은 길이었다. 그러다 굴삭기와 함께 몇 번이나 산등성이로 추락했다. 윤선 씨는 "남편이 저 큰 중장비를 직접 몰고 다니다 5~6번 굴러떨어졌어. 죽다 살아났지"라고 회상했다.

5년 전에는 178번 도로 쪽에 나 있던 온천 출입구가 차단됐다. 차량이 불법 유턴을 자주 해 사고가 잇따르자 지역 정부가 샛길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완모 씨는 자구책으로 강에 나룻배를 띄웠다. 쇠줄을 연결해 반대편 출입로에서 손님이 배를 타고 건너올 수 있도록 했다. 한여름 뜨거운 해를 피하기 위해 배에 지붕도 만들었다.

▲ 한인 부부가 만든 온천장. 탕 바닥은 깨진 타일로 마감했다. © 황상호
▲ 온천장 선윤 씨가 매일 교체하는 물이 옥빛처럼 맑다. © 황상호

전 세계 유일의 온돌 캠핑장 

온천에는 탕이 5개다. 수온이 38도에서 49도로 다양하다. 윤선 씨는 매일 물을 빼고 솔로 바닥 청소를 한다. 이 때문에 유황 온천이어도 계란 썩는 냄새가 덜하다. 탕은 늘 옥빛이다. 이곳은 무엇보다 유서가 깊은 곳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체로키 부족이 신성시하던 공간으로 황금을 뜻하는 '타우로니카’(taulonica)라 불렀다. 그러다 1850년대 이 일대에 캘리포니아 2차 황금러시가 일어나면서 광산업자들이 찾아왔고, 한 업자가 이곳을 보고 체로키어 발음을 따라 델로네가(Delonegha)라고 불렀다. 숙박 시설과 마사지 시설을 만들었다. 하지만 황금 러시가 끝난 뒤 사람들이 떠나면서 수익성도 떨어져 모든 시설물이 자연화했다.

온천의 역사에 관한 윤선 씨의 얘기는 효능에 관한 자랑으로 이어졌다.

“걸어 다니면 발바닥에 사금이 묻어. 이게 바로 황금물이야. 물도 얼마나 좋은데. 아토피 환자, 소화 안 되는 사람, 두통 환자들이 여기 와서 많이 치료했어. 물을 떠 가서 집에서 마시기도 해. 내가 4년 전에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목을 많이 다쳤거든. 그래도 온천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정형외과에 가니까 의사가 내 목 건강 상태가 20대래.”

▲ 온천장 주인 윤선(왼쪽) 씨와 아내 우세린(오른쪽). © 황상호

남편은 80대, 아내는 70대로 띠동갑이다. 로스앤젤레스 건설업계에 불경기가 닥치자 십여 년 살던 집을 팔고 아예 이곳으로 이주했다. 부부는 온천 옆에 커다란 텐트를 치고 산다. 냉장고도 선풍기도 없다. 간단한 전기는 태양열 전지판으로 공수한다. 윤선 씨는 문자 메시지나 음성 메일로 온천 예약을 받는다. 통신이 잘 안 돼 메시지가 들어온 것 같으면 178번 도로 가까이 걸어 올라간다. 그녀만이 통신 안테나가 열리는 곳을 안다.

백미는 캠핑이다. 돈을 얼마간 더 주면 온천에 설치된 온돌 텐트에서 묵을 수 있다. 완모 씨가 온천수를 파이프로 연결해 텐트 아래로 지나가도록 만들었다. 은근한 온기를 품은 바닥이 기분마저 노곤히 녹인다. 봄가을에도 이불만 덮으면 춥지 않게 산골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식기류도 다 있어 먹을 것만 가져가면 된다. 윤선 씨는 “밤에는 온천에 몸을 담그고 컨강에 낚시줄을 던져 물고기도 잡을 수 있어”라며 살구빛 잇몸을 드러냈다. 온천욕에 낚시, 전세계 유일의 ‘온돌 캠핑장’이라니. 별천지다.

찾아가는 길은 간단하지 않다. 내비게이션에 '델로네가(Delonegha)'로 검색해 따라가면 178번 도로 위에 멈춘다. 내비게이션에 좌표(35°33'24.5"N 118°36'43.0"W)를 찍거나, 밀 크릭 트레일 헤드(Mill Creek Trail Head)를 검색해 간 뒤, 컨 캐년 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십여 분 가면, 왼쪽에 스누피와 우드스톡이 그려진 바위가 보인다. 그곳에 차를 세우거나, 차를 끌고 언덕을 내려가면 온천이 나온다. 해마다 다르지만 눈이 녹기 시작하는 6~8월은 강물이 넘쳐 온천이 문 닫기도 한다. 산불이 나면 이 일대가 차단된다. 인터넷은 안 된다.

▲ 온천은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야 한다. © 황상호

** 황상호는 <청주방송>(CJB)과 <미주중앙일보> 기자로 일한 뒤 LA 민족학교에서 한인 이민자를 돕는 업무를 하고, 우세린은 <경기방송> 기자로 일한 뒤 LA 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가정폭력 생존자를 돕는 업무를 한다. 


편집 : 박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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