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가상현실’ 속의 나는 누구인가

“갈게.”

▲ 임세웅 기자

민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현도 민을 바라보지 않았다. 민과 현은 그렇게 헤어졌다. 현은 집으로 돌아가며 살아야 할 이유를 탐색했다. 없었다. 현은 민과 함께할 때만 존재할 이유가 있었다. 깔끔히 빗어 넘긴 포마드 헤어스타일, 고루해 보이는 쓰리 버튼 수트와 하금테 안경, 파라부트 구두, 장미 줄기를 꺾을 때 나는 향기 ‘딥 디크 롬브로 단 로 오 드 퍼퓸’, ‘어젯밤에도 네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어’ 등의 감성적인 표현은 모두 민을 위한 것이었다.

현은 세상에서 사라질 준비를 했다. 인센스에 불을 붙였다. 은은한 향이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현은 샤워를 했다. 샤워하는 내내 울었다. 몸의 물기를 닦고, 낡았지만 깨끗하게 빤 속옷을 입고, 인센스 향을 깊이 들이쉬면서 스마트폰을 켰다. 민과 만나던 소개팅 앱을 켰다. 현은 아이디를 삭제하고 앱을 탈퇴했다. 현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는 더 이상 현이 아니다. 그는 창문을 열어 방안에 가득 찬 향 냄새를 빼며 라면을 끓였다. 소개팅 앱에서 만난 사람과 헤어질 때마다 그랬다. 그는 면발을 후룩거리느라 국물을 사방에 튀기면서 1920년대 개화기 모던보이의 외양, 냄새, 말투를 빠르게 지워나갔다. 라면을 먹으며 현에 관해 생각했다. 민은 왜 현에게 헤어지자고 했을까? 필요에 따라 만나고 필요가 없어지면 관계도 끝내는 요즘 세상에, 현이라는 ‘캐릭터’는 민에게 어떤 걸 충족시켜주지 못했을까?

▲ 어플리케이션을 통한 만남이 활발한 시대다. ⓒ pixabay

그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내고는 친구와 커피 약속을 잡았다. “커피 한잔 콜?” 그는 라면 냄비를 씻어 커피 물을 준비했다. 그는 현과 나눈 사랑을 정리해야 했다. ‘현은 자신이 아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캐릭터’를 만들지 않고는 연애를 못 하겠냐?”

“응.”

친구의 말에 그는 단호했다.

“수없이 말했지만, 현대사회의 사랑은…”

“본질을 들키지 않는 게 본질이다?”

“그렇지. 꾸며낸 상대를 좋아하고, 그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실수로 꾸며낸 모습을 들키면 허겁지겁 끝내는 관계가 연인 관계지.”

친구는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깊이 결합하고 싶다, 온전히 이해받고 싶다, 이게 사랑하는 사이에서 바라는 거 아냐?”

“두 가지만 더 붙이자. 그러면서도 다치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도 해부당하고 싶지는 않다. 어때, 사랑의 본질은 들키지 않는 것이 맞지?”

친구는 커피가 쓰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29년간 모태솔로로 살다가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잖아, 내가.”

“이해받고, 결합하긴 해?

친구는 컵 안에 있는 검은 액체가 쓸개즙이라도 되는 듯 얼굴을 더 찌푸렸다.

“간다.”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한마디 툭 던지고 친구는 사라졌다.

‘진짜’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나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나를. 그렇게라도 사랑받지 않으면 외로워서 진짜 죽어버릴 것 같아. 그는 중얼거리며 소개팅 앱을 켰다. 이번 이름은 윤으로 정했다. 성격은 활달, 패션은 청바지에 화이트 스니커즈를 신고, 상큼한 과일 향의 페라리 라이트 에센스 향수를 뿌리는 ‘캐릭터’로 가자. 인터넷 쇼핑몰에서 청바지를 사고 앱에 프로필 등록을 완료했다. 윤이 등록을 끝내자마자 한 여성이 호감을 표했다. 예뻤다. 성격도 취향도 비슷한 것 같았다. 마음이 동했다. 청바지가 집으로 배달될 이틀 뒤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이틀 뒤, 윤은 택배 박스에서 바로 꺼낸 청바지를 입고 약속한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시키고 앉아있는데, 맨얼굴 여성이 들어왔다. 윤은 숨이 막혔다. 민이었다. 민은 윤을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왔다. 애써 모른 척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혀에서 강한 단맛이 퍼졌다. 머리가 띵했다. 민은 윤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저는 민이에요. 당신이 아는 그 사람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세요? 윤이에요, 현이에요? 아니면 또 다른 사람?”

커피가 너무 달았던가, 윤은 어지러움에 의식이 흐려지며 생각했다. 내 첫사랑이 30년 만에 나타난 것 같다고.


편집 : 양안선 PD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