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너라 벗고놀자] 황상호-우세린 부부 여행기 ⑬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는 활성화한 마그마의 작용으로 온천이 발달해 있다. 온천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신성시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온천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인 정착민이 원주민의 온천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 주변에 온천 리조트를 지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전현직 기자 부부가 이 지역 무료 자연 온천을 다니며 썼다.

▲ 캘리포니아 조던 온천 야경. © 오법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거라,
밀 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몽상가, 나는 내 발에 그 차가움을 느끼게 하네.
바람은 나의 헐벗은 머리를 씻겨 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무한한 사랑은 내 넋 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여인과 함께하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아르튀르 랭보의 시 ‘감각’이다. 검고 푸른 밤의 시각, 발 아래, 머리 위의 촉감, 공허 속의 충만함, 타자를 향한 그리움과 홀로서기. 산행을 하며 고작 허벅지 통증을 살피기 급급한 나로서는 도저히 범접하기 어려운 오감이다. 미국 자연 온천을 다닌 지 일 년이 넘자 주변에서 좋은 곳을 추천해 달라는 말이 많아졌다. 사실, 그 일이 내키지 않는다. 그곳에는 당신이 상상하는 하늘빛 욕조와 키 큰 야자수, 부드러운 목욕 가운,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속 풀장 같은 곳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죽은 이끼가 부유하고 쿰쿰한 유황 냄새가 나며, 옷은 덤불 속에서 갈아입어야 한다. 다만, 랭보의 길을 가는 자라면 기꺼이 추천하겠다.

금광 개발을 위한 지름길

캘리포니아 인요카운티 세콰이어 국유림에 있는 조던 온천(Jordan Hot Springs)은 시도 두 번만에 만날 수 있었다. 국유림 홈페이지에서 눈이 그쳐 출입구가 열렸다는 공지를 읽고, 6월 중순 컨빌(Kernville) 라임스톤 캠핑장(Limestone Campground)에서 하루 묵고 새벽에 넘어갔지만 산비탈 눈이 쏟아져 길을 막았다. 차로 억지로 넘으려다 바퀴가 눈에 빠지기도 했다. 캠핑용 프라이팬과 냄비를 꺼내 눈을 파내다 애꿎은 조리 기구만 부러뜨렸다. 군 전역 10년 만에 제설 작업이었다.

같은 해 8월에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인 14번 하이웨이를 타고 올라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접근했다. 눈은 없었고 길도 깨끗했다. 배낭에는 팩 소주 하나와 한식당에서 포장한 오징어볶음을 넣었다. 말 없는 산에서 진한 마늘 향과 피 토하듯 진 붉은 고춧가루가 덮인 매운 음식을 먹다 보면 말 못 할 새내기 이민자의 답답함과 억울함이 풀릴 것 같았다. 오징어를 씹다 ‘오징어 문딩이 같은 그놈’도 함께 씹어 삼키며 눈물을 팍 쏟고 싶은 날들이었다.

조던 온천에 가기 위해 먼저 트레일 입구에 있는 레인저 사무실에 찾아갔다. 출입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까다로운 절차는 없다. 입장료도 없고 예약도 필요 없다. 인적 드문 곳이라 어떤 사람이 들어갔는지 기록을 남기기 위한 절차다. 차종, 색깔, 출고연도까지 말해야 한다. 백발 할머니 앤 애덤스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오늘 두 번째 방문자네. 산에는 지금 한 가족밖에 없어. 고요하겠는 걸. 곰이 자주 나오니까 냄새나는 음식은 텐트 가까이 두지 말고, 처리할 수 없으면 줄에 묶어 나무에 높이 걸어둬.”

오징어볶음이 마음에 걸렸다. 레인저 사무실을 나가자 외부 게시판에는 이곳을 ‘곰 카운티’라고 부른다는 경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고딕체 글씨 크기가 100 포인트는 넘어 보였다.

출발점인 블랙락 트레일헤드(Blackrock Trailhead)에서 조던 온천까지는 편도 5.6km다. 계속 내리막길이다. 먹을 것을 든든히 배낭에 넣으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소나무 길을 따라 내려가니 푸른 초원이 펼쳐졌다. 곧 이들이 ‘크리스털 클리어(Crystal Clear)’라 표현하는 투명한 계곡물이 졸졸 흘렀다. 부러진 통나무가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일부 구간은 그것조차 없어 신발을 벗고 건너야 했다. 맨발이 물에 닿는 순간, 온몸이 오그라드는 극한의 한기가 느껴졌다. 8월 한여름이었지만 수온은 살을 도려내는 듯했다.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계곡물이 흐르는데도 씻지 못해 힘들었다는 어느 장거리 하이커의 말이 그때야 이해가 갔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11월부터 5월까지 출입이 금지된다.

▲ 조던 온천 가는 길. 줄곧 내리막길이다. 당연히 돌아올 때는 계속 오르막길. © 오법

온천은 금광 개발업자들이 개발했다. 1860년대 초 세콰이어 국유림 동쪽 코소 레인지(Coso Range)에 금과 은이 발견됐다는 풍문이 캘리포니아 일대에 퍼졌다. 국유림 서쪽 비살리아(Visalia) 광산업자들은 세콰이어 국유림을 직선으로 가로지를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일반 경로로 가면 시에라 산맥을 빙 둘러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광산업자 존 조던은 1861년 아메리카 원주민을 고용해 그들의 조언을 들으며 길을 뚫었다. 대부분 원주민이 쓰던 길이었다.

조던은 금광 남쪽 길인 조던 온천 루트를 개척하고, 광산업자들에게 통행료를 받기 위한 회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1862년 5월 뗏목을 타고 컨강을 건너다 암석에 부딪히면서 익사하고 만다. 그 후 와너라는 인물이 후원금을 모아 1863년 조던 온천 루트를 완성했다. 금광 개발이 끝난 1800년대 말에는 하이킹 명소가 됐다. 여름마다 텐트 20~30개가 쳐졌다. 온천 리조트도 만들어졌다. 산중 깊은 곳에 전화선이 연결되고 우편 배달도 왔다. 그러다 1978년 미연방 의회가 이 일대를 ‘골든 트라우트 와일더니스(Golden Trout Wilderness)’라는 원생 보전 지역으로 지정하면서 자연화했다. 골든 트라우트는 이곳에 서식하는 캘리포니아 토종 송어로 배가 황금빛을 띈다.

굿 버닝, 그때그때 태워야 산다

한 시간쯤 걷다 보면 2002년 발생한 맥날리 산불 피해 지역이 나온다. 폭격을 맞은 듯한 빌딩 만한 거목이 검게 탄 채 우뚝 서있다. 일부는 꺾여 무덤처럼 쌓여 있다. 겉은 완전히 잿더미지만, 속은 살아남아 기적같이 이파리를 틔운 나무도 있다. 기사회생이다.

당시 화재는 캘리포니아 최대 화재로 기록됐다. 주택 수십 채와 산림 610㎢가 타 재산 피해액만 4570만 달러(약 530억 원)에 이르렀다. 지리산국립공원 면적(440.4㎢) 1.4배가 숯더미가 된 것이다. 원인은 캠프파이어였다.

산불은 캘리포니아의 큰 골칫거리다. 매년 산불이 끊이지 않아 천문학적인 재산 피해를 낸다. 건조 기후인 캘리포니아에서 산불이 나면 덤불이 불타 강풍에 날아다닌다. 그러다 목조 주택 지붕에 폭탄처럼 떨어진다. 인가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된다. 목숨을 잃는 건 대부분 노인이다. 상황 판단이 더디고 움직임도 느려 화마의 먹이가 된다.

▲ 몸통 80%가 불탔지만 올해도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 오법

환경보호론자는 산불 원인을 기후 온난화로 지목하고 있다. 고온 건조한 날씨가 평균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산불이 많아졌다는 분석이다. 생태학자들은 빨리 마르는 외래 식물이 대거 유입되면서 불쏘시개 구실을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재미있는 분석이 있다. ‘스모키 이펙트’(Smokey Effect)다. 스모키는 지리산 반달곰처럼 생긴 미연방 산림청 마스코트다. 미국이 산불에 경각심을 가지게 된 건 2차 세계대전부터다. 1942년 일본군 잠수함이 캘리포니아 샌타바바라 외곽 유전을 폭격하면서 산불이 나 민가가 불타는 일이 발생한다. 그때 산림청과 전쟁광고위원회가 역사상 처음으로 화재 예방 캠페인을 시작한다. 1944년 산불 예방 홍보용으로 만든 캐릭터가 스모키다.

귀여운 생김새에 아이들은 스모키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그 인기에 영합해 가수는 그를 위한 노래를 만들었다. 스모키는 자기만의 우편번호도 가지게 됐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성인 96%가 스모키를 안다고 응답했다. 미키마우스에 견줄만한 인지도다.

덕분에 산불도 크게 줄었다. 1944년 8만 ㎢였던 산불 피해 면적이 2011년 2만6000㎢로 3분 1도 넘게 감소했다. 스모키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도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지나친 산불 예방이 대형 산불의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산에서 적당히 불이 나야 쌓여있던 낙엽과 가지가 타는데, 지나치게 사람들이 산불을 조심하면서 솔방울, 이파리, 나뭇가지가 쌓여 대형 화재로 번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스모키 이펙트.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사람이 죽는다고 말했던 명상 마니아인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늘 말했다. “참지 말고 흘려보내라, 그때그때 태워 버려라.”

온천 족욕탕에서 즐기는 캠프파이어

두 시간쯤 걸으니 버려진 오두막이 나왔다. 배낭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계곡 가까이 걸어가 보니 부러진 나무로 둘러친 자연 수영장에서 누군가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린 두 아들이었다. 이정표가 없어 온천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저쪽이야. 여기 계곡을 건너 10분 정도 걷다 보면 초원이 나와 그때 왼쪽으로 꺾으면 돼. 하얀 암벽이 보이는데 그 계곡 건너편에 있어.”

목적지에 다다르자 길이 헷갈렸다. 이정표가 가리킨 방향도 모호했다. 아이 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걸었다. 초원이 보였지만 하얀 암벽은 없었다. 아내를 쉬게 하고 혼자 길을 찾았다. 초원 끝에 가서야 애 아버지가 말한 하얀 암벽이 언덕 아래 보였다. 김이 올라오는 온천이 계곡 옆 풀숲에 있었다.

▲ 함께 여행 간 서핑 동호회원 오법(왼쪽) 씨와 나의 아내. 야생화 여바맨사가 활짝 피어 있다. ⓒ 황상호

조던 온천은 유황 성분과 이끼가 뭉쳐 지저분했다. 물에 들어가기 전 온천 물꼬를 트고 주변에 있던 뜰채로 부유물을 건져냈다. 바닥 흙이 가라앉자 물이 제법 깨끗했다. 온천은 몸 전체를 담그기에는 수위가 낮다. 하이킹으로 피로한 발을 담그기 제격인 족욕탕이다. 10명 정도 발을 담글 수 있다. 수온은 38도로 뜨겁다.

온천 주위에는 도마뱀 꼬리라 불리는 다년생 수변 식물인 여바맨사가 활짝 피어 있다. 북미 자생식물인데 스페인어로 ‘고요한 식물’(Calming Herb)을 뜻한다. 1박 2일 내내 이 거대한 자연에는 우리 일행 셋과 오다 만난 부자 셋이 전부였다. 딱 어울리는 꽃말 아닌가?

우리는 온천 위 낡은 오두막이 있는 언덕에 텐트를 쳤다. 오두막은 1992년 연방 역사 보전지역(National Historic Landmark)으로 지정된 장소다. 한때 성업하던 온천 리조트다. 당시 이곳에는 송어 플라잉 낚시와 온천을 즐기러 전국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오두막 문을 열자 부식된 침대 매트리스와 먼지 더께가 쌓인 책상, 이가 나간 찻잔이 남아 있었다. 어딘가 좀비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으스스했다.

▲ 숲속에 있는 이라고는 우리 일행과 저 멀리 있는 가족 한 팀. 고요하다. © 오법

그때부터는 시간을 죽이는 게 일이다. 딱히 할 일이 없다. 탐험용 넓적 칼로 나무를 깎아 이쑤시개를 만들고, 낮잠 자는 아내 입을 괜히 열어 이에 낀 음식 찌꺼기를 파냈다. 아내는 슬쩍 눈을 뜨더니 무시하고 그대로 잠을 잤다. 깎은 이쑤시개가 늘어나, 바닥에 박아 울타리를 쳐 보았다. 그러다 지겨워 나도 낮잠을 잔다. 인터넷은 안 된다. 약간의 손끝 떨림이 온다, 인터넷 금단 증상이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괜히 전화기를 톡톡 건드려 본다. 그리고는 냄비를 올려 오징어볶음을 데워 먹었다. 소주를 열어 한 모금씩 귀하게 마신다. 불쑥불쑥 오징어 같은 직장 상사 생각이 떠오른다. 잡념은 두 가슴 사이 똬리를 틀고 온 기운을 빼놓는다. 얄궂은 직장 상사는 붓다, 예수, 알라보다 강하다.

밤의 장막이 쳐지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공포스러울 것 같던 오두막도 절대 어둠에 정체를 감춘다. 오두막 양철 지붕에 솔방울이 ‘탕’하고 떨어져야 존재를 드러낸다. 공포는 시각의 종속 변수다.

지천이 땔감이다. 바짝 마른 나무를 모아 불에 던진다. 꽉 찬 나무는 오래 탄다. 화로의 진짜 연료는 부지깽이를 든 자의 상념이다. 영원히 꺼지고 싶어 하지 않는 불은, 그 생각을 계속 태워야 살아 남는다. 불에 묶인 자는 나뭇가지를 연신 불에 올린다. ‘눅눅한 구들에 덜 마른 느릅나무 넣어, 푸른 불길을 바라봤다’던 박준의 시 ‘당신의 연음’에서처럼, 나도 아무에게도 온전히 설명하기 힘든 디아스포라의 번뇌를 ‘뚝뚝 뜯어 넣는다’. 굿 버닝.


** 황상호는 <청주방송>(CJB)과 <미주중앙일보> 기자로 일한 뒤 LA 민족학교에서 한인 이민자를 돕는 업무를 하고, 우세린은 <경기방송> 기자로 일한 뒤 LA 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가정폭력 생존자를 돕는 업무를 한다. 


편집 : 박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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