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역차별 담론'

▲ 정소희 PD

지난해 1월, 방송인 유병재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엄마 아빠는 PC충!!’이라는 영상을 올렸다. 그의 영상에는 ‘PC함’ 곧 ‘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함’을 강요하는 부모가 나온다. 이 부모는 다이어트 하는 딸의 애인을 비만 혐오자로 규정하고, 백인 남성인 그가 흑인이면 좋겠다고 말한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고,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정치적 올바름이 성급한 태도와 만난 ‘과도한 PC함’을 비꼰 것이다. 30만 조회수를 기록한 이 영상 댓글 창에는 환호성이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영상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주류, 지배 담론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PC충’을 비판하려면 ‘PC함’에 따라 실제 불편을 겪거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해야 한다. 한국에서 ‘PC함’과 관련한 논쟁은 주로 문화 분야에서 벌어졌다. 미국 게임 개발사 블리자드가 만든 한 게임 캐릭터가 성소수자임이 밝혀지자 유저들은 ‘PC묻은 게임’이라 비난했다. 20개가 넘는 마블 스튜디오 영웅 영화 중 처음으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 <캡틴 마블>이 개봉되자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서사의 주체를 새로이 발굴하고, 소수자성을 콘텐츠에 포함하는 일이 ‘PC충’이라 불릴 일인가?

칼럼니스트 위근우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유병재의 콘텐츠가 잘못된 전제를 세웠다고 썼다. 그가 주장하는 ‘과도한 PC함’이 허수아비라는 것이다. 위근우가 옳다. ‘PC함’으로 실제 불편을 겪은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설마 fireman(소방관)을 firefighter로 바꿔 부르자는 일을 불편이라고 말하는 걸까? ‘과도한 PC함’이 문제였다면 리벤지 포르노가 소비될 일이 있었을까?

때마다 불거지는 ‘단톡방 성희롱’은 여성혐오범죄의 새로운 종(種)이 됐다. 이주노동자나 북한이탈주민이 겪는 차별은 어떤가? 지역 대학 졸업생이 채용과정에서 마주하는 차별은?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뒤틀린 능력주의를 무기로 소수자에게 차별과 낙인, 배제를 서슴지 않았다. ‘PC함’이 과도해 공정과 평등이 한국의 무고한 시민에게 불편과 역차별을 가했다면 불평등지수는 개선됐을 것이다. 하지만 통계가 증명하는 한국 현실은 차별 그 자체다. 한국 성별 임금격차는 16년간 1위이며 남성 기준 여성 임금이 70%를 넘긴 일이 없다.

▲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는 언제나 약자로 살아왔다. ⓒ pixabay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는 하청 노동자가 대부분이라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이 생겼다. 고성장 시기에는 저곡가 정책을 통해 도시 노동자의 저임금 불만을 농민의 희생으로 메꿨다. 인구 유출과 고령화, 지역 격차는 심해졌고, 저성장 시기인 지금에 이르러 경제위기는 공고했던 도시, 노동자, 남성의 삶까지 위협해 역차별 담론을 이끌어냈다. 한국 사회는 차별을 동력으로 성장해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PC함’은, 평등은, 차별해소는 한국 사회에서 한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한국에서 역차별 담론은 언제나 이겨왔다. 이 말은 언제나 차별받는 사람들끼리 다퉈왔다는 의미이고,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사람이 이겨왔다는 뜻이다. 작가 손아람은 남성이 주장하는 군대, 위험노동, 데이트 비용, 부양 부담이 역차별이 아닌 선행차별의 결과라 말한다. 남자만 군대에 가도록 법을 만든 이는 남자다. 이런 법을 만든 이유는 여성을 연약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며, 여성이 받는 경제적 불이익이 당연하다고 여겨서다.

역차별은 지금까지 누군가를 차별해 왔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하는 차별비용이다. 그럼에도 역차별이 이겨온 이유는 차별하는 이유를 능력이라는 말로 바꿔 소수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주류 담론이 되지 못한 이유는 차별받는 모든 이들이 공정∙평등의 가치가 사회 전체에 줄 이익을 배우지 못해서다. 교육 제도와 언론의 무능력은 차별과 역차별 담론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태를 낳았다. 지금 청년 세대에서 심화되는 젠더 갈등은 그들이 놓인 취약한 조건을 반영한다.

외환위기 이후 안정된 일자리가 사라지고 구조조정이 위기 극복 방법으로 제시되면서 청년들은 불안한 삶에 내몰렸다. 극한 경쟁에 놓인 청년들은 타인이 차별받고,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거나 알아도 외면한다. 소수자우대정책은 역차별이 되고, 혐오는 권리라 부른다. 안타까운 것은, 역차별 담론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차별의 피해자라는 점이다. 차별과 역차별 싸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공고한 차별 구조를 인식하고 말하는 데 있다. 역차별 담론이 계속 이기는 한국은 점점 더 불행을 피라미드 가장 아래로 이전한다. 그 사회는 디스토피아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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