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들의 시선 ⑮] 대통령에게 쓰는 편지 2 - ‘여성혐오’

한국사회의 문제를 ‘청년기자들의 시선’으로 살펴보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 기획은 언론을 바로 세워 세상을 바꾸겠다는 젊은 언론인들의 염원을 담아 기성사회에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다. 세상은 여전이 암울하고 임기 중반을 넘긴 현 정권의 사회개혁 역량도 의심스럽지만 ‘진보 대통령’의 진정성을 아직은 완전히 저버릴 수 없기에 이 시리즈는 ‘대통령에게 쓰는 편지’ 4편으로 마감한다. 네 편지의 키워드는 ‘반려동물, 여성혐오, 재벌개혁, 저출산’이다. 젊은 언론학도들의 제언에 대통령이 작은 메아리라도 화답해주길 기대한다. (편집자)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뒤늦게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시골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박동주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목소리조차 낼 힘이 없는 수많은 이들을 대변하는 기자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께 편지를 쓰게 된 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혐오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지난해 11월 연예인 설리 씨가 사망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연예인 구하라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악플이었습니다. 여성 연예인의 복장과 외모에 집중된 성적 발언, 성과 관련된 지저분한 루머와 논란의 확대 재생산 등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진 집단적 조리돌림이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여성혐오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습니다

더는 악플의 피해를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여성 연예인 몇이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걸 SNS에 인증했다가 누리꾼에게 악성 댓글 테러를 당하는 일은 예사입니다. 단순히 ‘Girls can do anything(여성은 뭐든 할 수 있다)’이란 문구가 새겨진 휴대전화 케이스 사진을 첨부한 한 SNS 게시물에도 악성 댓글이 달립니다. 여성 연예인 측에선 휴대폰 케이스를 “패션 브랜드 업체에서 협찬받은” 제품이라고 해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성의 일상 발언에 악플을 다는 사회적 분위기인데, 속옷을 입지 않고 찍은 사진을 올린 SNS 게시물에 성희롱 댓글이 달리지 않는 게 이상합니다. 쓰다 보니 비상식이 상식이 된 이 사회가 더 이상하네요.

▲ 여성 연예인을 향한 여성 혐오는 악성 댓글이라는 탈을 쓰고 나타난다. 여성 혐오는 지난해 연예인 설리 씨와 구하라 씨를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 심각하다. © KBS

여성 연예인을 괴롭히는 댓글 폭력은 이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연예계 풍토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그 뿌리에는 폭력을 묵인하는 여성혐오가 자리합니다. "20대 여성 채용 안 함. 말썽 일으키는 전례가 많았음." 얼마 전 유명 프랜차이즈 고깃집이 내건 구인광고 문구입니다. ‘20대 여성과 말썽’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성립되지 않는데도 점주는 여성혐오에 기반한 확증편향을 일반화했습니다. 본사가 나서서 사과까지 하는 일이 벌어져도, 이 일이 별거 아니라는 누리꾼 댓글을 보면 이 사회가 여성을 향한 폭력을 얼마나 가벼이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요? 여성혐오 표현을 제대로 비판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묵인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실명제가 대안으로 떠오릅니다. 자기 이름이 드러나면 악플을 달지 못할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겠지요. 실명제는 이미 헌법재판소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고,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현재도 인터넷에 댓글을 쓰면 IP 추적이 가능해서 사실상 준실명제이기 때문에 실효성도 크지 않습니다. 현재는 페이스북처럼 실명 기반 SNS에도 악플이 달리고, 아이디를 도용해 악플을 쓸 수도 있습니다.

여성혐오는 차별금지법으로 완화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혹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를 보셨는지요. 드라마에 나오는 대통령은 차별받는 소수를 위한 대통령입니다. 청와대 참모진과 함께하는 회의에서 차별금지법이 안건으로 오르자 “법제처에 연락해 차별금지법에 대한 법령안을 준비하라”고 지시합니다. 참모진은 “대선 국면에서 적합하지 않다”, “지난 시기 모든 정부가 부담스러워한 법안”이라며 우려를 표합니다. 대통령은 말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평등권이 아닌가? 내가 뭘 더 고려해야 하느냐?” 이 말을 한 드라마 속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 유엔은 한국에 ‘“인종, 성적 지향, 성정체성 등을 명시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며 13차례나 권고했다. ⓒ flickr

국가는 평등을 실현할 책무가 있습니다

개인에게 달리는 악플은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등 기존 법을 활용해서 규제할 수 있습니다. 여성을 향한 비하 발언을 막으려면 혐오 표현에 관한 별도 근거 법규 마련이 필요합니다. 현실적으로 바로 실현하기 어렵다면, 정부는 먼저 헌법상 책무인 차별금지 원칙을 확인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 ‘사회적 논란’이나 ‘사회적 합의 없음’이 핑계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유엔은 2007년 이래 한국에 ‘인종, 성적지향, 성정체성 등을 명시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며 13차례나 권고했습니다. 차별금지 사유를 둘러싸고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조처를 정부가 충분히 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별을 이유로 어떤 종류의 사회적 낙인과 혐오,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걸 공식적으로 명시하라’는 유엔 권고는 더는 권고에 그쳐선 안 됩니다. 모든 소수자의 평등을 실현할 헌법상 책무가 국가에 있음을 공식적인 형태로 명시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이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무 이유 없이 혐오 표현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 고통이 여성을 죽음으로 내모는 세상입니다. 이제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차별과 혐오를 방지하는 종합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대통령께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 말할 정도로 여성 인권에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대체 언제, 어떻게 여성과 남성 간 평등을 위한 법제를 만들려 하십니까? 요즘 분위기를 보면 그날이 언제일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는 알겠습니다. 대통령께서 드라마에 나오는 대통령이 되신다면 그날이 빨리 올 겁니다. 제가 나중에 딸을 낳고 그 아이가 자라 학교에 다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땐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길 바랍니다. 그 시작은 대통령님이길, 역사가 대통령님을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 기억하길 바랍니다.


편집 : 권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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