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냉장고’

▲ 최유진 기자

‘왜 남자들만 했을까?’ 돌로 만들어진 반지하 빙실(氷室)에서 생각했다. 초등학생 때 안동댐으로 소풍을 가곤 했다. 댐 아래 민속촌에는 조선시대 냉장고인 ‘석빙고’가 있다. 보물 제305호 안동 석빙고는 원래 있던 예안면에서 지금 자리로 옮겨왔다. 댐을 지으면서 마을이 수몰된 탓이다. 옛날 남자들에게는 이곳으로 얼음을 옮겨오는 게 큰일이었다. 혹한에는 더욱 고역이어서 강변마을 남자들이 부역을 피하려고 잠시 도망가기도 했다. ‘석빙고 과부’라는 말까지 생겼다. 부부가 같이 일했다면 어땠을까? 누구 하나 두고 떠나는 일이 있었을까? 

지금도 매년 겨울이면 안동석빙고보존회가 얼음을 저장하는 행사인 ‘장빙제’를 여는데 4년 전에 처음 구경했다. 용정교 아래 반변천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얼음을 자르는 게 시작이다. 소달구지에 얼음을 싣고 석빙고로 와서 잘 보관되길 비는 제사를 지낸다. 이 과정에 여자를 찾아볼 수 없다. 재현행사인 걸 알고서 봐도 답답하고 서글펐다. 과거 조선 남정네들이 낙동강 칼바람을 맞으며 몸이 고됐을 건 분명하다. 

▲ 조선시대 장빙제를 재현하는 행사에서 남자들이 얼음을 운반하고 있다. ⓒ 안동축제관광재단

집에 있던 여자들이라고 편했을까? 집 안에 있다는 이유로 여자들은 ‘복에 겨운’ 존재가 된다. 행사가 끝나고서 남자들은 떡과 과일을 돌리고, 국밥이며 막걸리도 먹는다. 제사상 음식이며 뒤풀이 술상은 다 누가 차렸을까? ‘남존여비’가 엄격한 조선에서 남자는 정주간에 발조차 들이지 않았다. 음식 만드는 일은 온전히 여자 몫이었다. 밖으로 보이지 않는 데다 당연하게 여겨져서 노고를 인정받기도 어려웠다. 

조선에서 양인 남자는 ‘정’(丁)으로 편성돼 백성으로서 의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여자가 하는 부엌일은 공식적인 ‘부역’ 의미를 갖지 못했다. 고생한 티를 내려면 집에서 쫓겨날 각오부터 해야 했다. 시부모가 시켜서 한 일이라면 더욱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세종실록>에 나온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보면, 여자가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말이 많으면 일방적으로 이혼당할 수 있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30대 중반 여자 김지영(정유미 분)은 엄마이자 아내로 산다. 매일 아침 냉장고 문을 연다. 남편이 밥을 먹고 떠나면 반찬통을 켜켜이 쌓는다. 쏟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냉장고 안으로 밀어 넣는다. 조선시대처럼 석빙고에 얼음 재 놓을 필요 없으니, 남자들은 일을 던 셈이다. 대신 육아도, 직업 생활도 남자든 여자든 다 하는 시대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역할 고정관념도 많이 변해왔다. 그런데 왜 답답한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을까? 집안일 하는 남자는 대접해주면서, 회사일 하는 여자는 눈치 주는 ‘헬조선’이기 때문일까? 임신한 여자 김지영은 ‘보호대상’이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집으로 보냈다면, 출산한 여자 김지영은 다시 회사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조선시대에는 여자를 대놓고 집안에 가뒀다면, 지금 한국 사회는 은근히 집으로 밀어낸다. 

▲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 김지영은 결혼과 육아로 '경력단절'을 겪는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냉장고는 성별에 관계없이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한다. 석빙고를 채우던 남자들도 맹추위를 벗어나게 됐고, 여자들도 제사상 차려야 하는 수고를 덜게 됐다. 부부가 생이별하는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몸만 같이 있다고 부부일까? 내 마음은 냉골 같은 집에 갇혀 있는데, 당신 마음만 열정으로 부풀어서 세상을 날고 있다면? ‘성역할 고정관념’은 아직도 얼음장처럼 단단하다. 93년생인 나는 그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 대신, 여전한 이 시대의 냉기를 같이 맞아낼 이와 함께 매일 아침 냉장고를 열고 싶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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