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들의 시선] ④

가짜뉴스와 조국사태를 둘러싼 받아쓰기 논쟁은 오늘 우리 언론상황을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서초동 집회장의 ‘손석희는 돌아오라’는 손 팻말과 KBS∙알릴레오 간 논쟁은 변화하는 언론환경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두 장면이다. 과연 이 땅에 언론은 있는가? 이 시대 진정한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청년기자들의 시선] 두 번째 주제는 ‘언론’으로, ‘기자∙피디는 누구인가’ 묻는다. ‘회사원, 로베스피에르, 불, 고수’ 네 개의 키워드로 오늘의 언론을 바라본다. (편집자)

<키워드 셋, 고수>

19세기 조선 시대의 최고 콘텐츠는 판소리였다. 판소리는 전해 내려오는 얘깃거리를 노래와 사설로 엮으며 주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주제로 삼았다. 피지배층의 삶을 현실 그대로 드러내고, 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을 표현했다. <심청전>의 심청은 어려운 환경을 딛고 용궁 환생의 구원을 받는다. <춘향전>의 춘향은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며 핍박받던 당시 여성을 대변하는 주체적 여성의 면모를 보여준다. 판소리는 대중 예술로 시대를 대변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했다.

▲ 판소리는 19세기 이 땅의 민중의 피폐함과 그들의 희망을 동시에 드러내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21세기의 판소리는 무엇인가? 방송이 이 시대의 판소리가 되어야 한다. ⓒ pixabay

판소리는 사회비판을 통해 사회통합의 기능까지 담당했다. 〈흥부가〉는 조선 후기의 빈부격차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자본가 놀부에게 매까지 맞으며 수탈당하는 흥부는 조선 시대의 로또와 같은 낭만적인 방식, 호박씨 기적이 아니고서는 가난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빈농이었다. <흥부가>는 타락한 황금만능 시대를 배경으로 물질적 가치에 관심이 증폭된 시대 상황과 인간 심성 문제를 다룬다. 병든 용왕을 구하기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는 〈수궁가〉는 봉건체제를 겨냥한 통렬한 풍자와 미학이 담겨 있다. <수궁가>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결 양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21세기 판소리는 방송

21세기 오늘 대한민국의 판소리는 방송이다. 판소리는 수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열리는 공연이다. 방송 또한 대중을 상대로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조선 시대의 판소리에 비해 오늘날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날 선 세상 비판을 보기 어렵다. 민중의 생각과 희망을 반영한 판소리 사설처럼, 방송이 서민의 애환을 담아내며 다양한 계층을 포용해야 한다. 다큐멘터리는 서민들의 애환을 드러내고, 시사 프로그램은 지배층에게 날 선 비판을 하고, 예능 프로그램은 정치 풍자의 지평을 늘려가야 한다. 방송이 21세기 서민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판소리가 돼야 한다.

방송이 21세기 판소리라면 PD는 판소리에서 북을 치는 고수다. 판소리 하면 창을 하는 소리꾼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고수가 없는 판소리는 상상할 수 없다. 고수는 소리꾼이 대중 앞에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북 반주를 한다. 고수의 장단 덕분에 소리꾼의 노래(창), 말(아니리), 몸짓(발림)이 어우러져 판소리는 서사적인 이야기로 발전해간다. PD는 프로그램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고수다. 사람들은 프로그램 속 소리꾼인 프로그램 출연자를 먼저 떠오르겠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북을 치고 있는 고수, PD가 있다.

고수는 판소리 공연에서 연출가와 지휘자 역할을 한다. 소리꾼의 소리가 뒤처지면 북 장단을 빨리 쳐 빠르게 이끌고, 창이 빨라지면 북 장단을 느리게 쳐 공연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고수는 추임새를 활용해 소리판에 흥을 돋우고, 소리꾼이 더 좋은 소리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다. 방송에서 PD 역할도 마찬가지다. PD는 프로그램 총 책임자로 프로그램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출연자가 최대 역량을 낼 수 있게 이끈다. PD의 북 장단은 프로그램의 성격과 톤이 되며, 출연자의 소리와 맛깔스럽게 조화를 이루어 프로그램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 속에서 세상의 이야기는 웃음이 되고 눈물이 된다.

▲ 방송은 21세기의 판소리다. 지금 방송을 보면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서민들의 아픔과 눈물도 읽히지 않는다. 판소리를 이끌고 갈 고수는 어디 있는가. ⓒ EBS

피디가 그려내야 할 세상의 웃음과 눈물

판소리는 당대의 구체적인 사회 현실과 일상의 삶을 반영한 새로운 사설을 첨가하고, 다양한 음악 어법을 개발해 음악적 표현 능력을 확장해왔다. 판소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다양한 계층을 향유층으로 견인해 낸 흡인력의 비결이다. 디지털 플랫폼 시대다. PD들은 디지털 미디어 시장을 이해하고, Z세대 같은 새로운 세대들의 가치관과 트렌드를 반영할 새로운 포맷을 개발해야 한다. 판소리가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담아내듯 방송은 현재 세상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한다. 지금 방송을 보면 세상도, 서민들의 아픔과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이 시대의 판소리인 방송은 어디 있는가, 고수는 어디 있는가?

(윤재영 PD)


<키워드 넷, 불>

신문이란 마이크다. 작은 소리를 크게 증폭시킨다. 마이크를 이용하면 목소리 작은 사람도 큰 소리를 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언제나 강자들의 목소리가 주를 이뤘다. 신문이라는 마이크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일이다. 약자들은 자신들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신문을 만들었다. 신문은 전달하는 도구이기에, 직접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목소리를 내는 여러 방법을 사용한다. 일반기사로 사실을 전달하고, 심층기사를 통해 의제를 제기한다. 자신의 작은 목소리를 키우고 싶은 오피니언 리더들은 글을 통해 의견을 전달한다. 다양한 기사들이 모여 신문을 이루고 사회의 여론이 된다.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약자들은 가려져 있던 금기와 성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악행에 분노하며 아픔에 연대했다.

▲ 신문은 약자들의 목소리를 담는 마이크다. 마이크가 제 기능을 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란 제도가 작동할 수 있다. ⓒ 정재원

신문은 약자의 마이크

신문은 약자의 마이크였고 민주주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마이크가 약자의 목소리만 담아낸 것은 아니었다.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소리가 들어가기도 했고, 큰 목소리를 더 증폭시키기도 했다.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가치와 다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오늘 신문 본연의 목적을 다시 생각한다. 신문은 세상의 작은 목소리를 담아내는 마이크답게, 약자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전달해야 한다. 세상의 작은 말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약자들이 연대해 세상을 바꿀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기자는 불이다. 인간은 불을 발견하면서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원시 집단은 사회와 국가로 발전했다. 불은 인류발전의 원동력이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제대로 대변되고 여론이 정상적으로 모일 때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세상의 목소리를 들어 기록하는 이가 기자다. 기자는 새로운 세상을 밝힌 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불은 뜨겁다. 기자는 숨겨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둠에 다가가 불을 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혀낸다. 뜨거운 가슴으로 아픔과 슬픔, 불합리를 드러내 세상의 분노를 만들어낸다. 기자는 뜨거운 존재다. 때로는 자신이 활활 타 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사명감과 정의를 지키다 산화하기도 한다. 불은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춘다. 기자는 사회 문제들을 드러내 프레임을 짜고 보도한다. 불이 모든 곳을 밝힐 수는 없다. 불이 닿는 곳 아래에는 그늘이 진다. 기자의 영향력이 사회에 해를 불러오기도 한다. 조절 능력이 없는 불과 같다. 불의 힘이 너무 강해지면 큰 화재가 일어나 재산 피해를 보고 사람이 죽는다. 악영향이다. 불은 견제가 필요하다. 무소불위의 기자는 ‘기레기’가 된다.

▲ 기자는 ‘먼저 생각하는 사람’ 프로메테우스의 뜨거운 불이다. ⓒ ancient.eu

기자는 뜨거운 불이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라는 이름은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기자는 불이면서 프로메테우스다. 남들보다 먼저 알고, 먼저 생각한다. 신문과 방송이라는 ‘마이크’ 같은 매개체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도 갖고 있다. 누구보다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불의 위험성을 잘 알아야 한다. 지금 마이크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불은 어둠을 밝게 비추고 있는가? 마이크가 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약자들이 피해를 본다. 인간에게 훔친 불을 전해준 죄로 코카서스의 바위에 묶여,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에 간은 다시 회복되어 영원한 고통을 겪고 있는 프로메테우스를 기억해야 한다. 세상과 같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며 분노해야 한다.

(정재원 기자)


편집 : 신수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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