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인생’

▲ 조현아 PD

시작과 동시에 끝을 간절히 원했다. 초등학교 내 체육 수업 시간 얘기다. 운동신경이 둔한 나는 체육시간이 늘 고역이었다. 왜 내 몸은 앞구르기를 해야 하는데 옆으로 굴러가는지? 친구들은 잘만 넘는 뜀틀이 왜 그리 높은 장벽과 같은지? 친구들은 내 차례만 되면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둔한 몸을 원망했다. 지금에야 나의 ‘일부’로 잘 받아들이고 살지만, 그때는 정말 수업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끝나고 결말을 맺길 바라는 또 다른 이들이 있다. 일본 중장년층들이다. 일본에서는 슈카쓰(종활∙終活) 산업이 붐이라고 한다. 초고령사회의 새로운 장례 풍토인데, 살아 있고 의식 있을 때 삶을 잠정 정리하고, 원하는 모습의 ‘장례’를 맞이하게 돕는 것이다. 스스로 간병과 장례 절차, 묘지 선택 등을 미리 결정한다. 함께 공원묘지 투어도 가고, 유언을 담은 영상 데이터를 영구 보존하고 ‘고독사보험’도 들 수 있다. 다른 이에게 유독 민폐 끼치기 싫어하는 일본인의 성향이나 문화와 맞물려 슈카쓰는 성업중이다.

슈카쓰와 관련해 떠오른 건 한국의 ‘졸혼’이다. ‘졸혼’은 어느 정도 나이 든 부부가 이혼하지는 않되 독립되어 개별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제 노인 열에 넷이 ‘졸혼’에 찬성할 만큼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 오랜 기간 함께 산 부부는 상속 위자료 문제, 자녀 거취나 외부 시선 등 모든 껄끄러운 문제를 고려해 결혼을 졸업한다. ‘졸혼’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지만, 실은 함께 연을 맺고 살아가는 부부의 삶에 끝을 고하는 일이다.

슈카쓰, 졸혼… 삶의 마무리와 결혼. 언제부터 생의 가장 주요한 단계들을 서둘러 끝내야 하는 세태가 도래한 걸까? 삶이 끝나지 않았는데 미리 ‘종활’을 준비하고, 어찌어찌 살아온 오랜 결혼 생활에 ‘졸업’을 선언한다. ‘쿨’하고 아름답게 끝을 맞는 거라 하지만 석연치 않다. 고독이든 질병이든 빈곤이든 아름답게 죽을 수만은 없는 우리 모습을 숨기고, 자녀나 돈 문제 등 이혼 후 발생하는 리스크는 피하되 원하는 ‘결말’의 겉모습은 추구하는 것 같다. 쉽지 않게, 모나게 살아온 세월과 관계를 ‘종’ 또는 ‘졸’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는 것이다.

프린스턴대 대니얼 카너먼 박사는 ‘끝’에 관한 신기한 연구 결과를 내놨다. 그는 많은 환자들에게 신장결석과 대장내시경 수술을 받는 동안 60초 간격으로 1-10 사이 통증 수준을 기록하게 했다. 다 끝나고 다시 총 통증 정도를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답한 평균값은, 객관적 결과와 전혀 달랐다. 그것은 최정점과 맨 마지막 고통 수치를 합쳐 낸 중간값과 비슷했다. 이를 ‘정점과 종점 규칙’이라 한다. 어쩌면 우리 인생 여정의 값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최정점에 있었을 때와 맨 마지막 끝을 합친 값이 평균 삶의 값으로 남는 것이다. 쓰라린 고통의 각인이든, 과분한 기쁨과 행복이든. 어찌 됐든 의미 있는 결말을 거두는 것은 참 중요하다.

▲ 한국 '졸혼'과 일본 '슈카쓰'는 각각 결혼과 장례 같은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을 아름답게 끝내려는 의지가 반영됐다. © Pixabay

생각해보면, 인생에 각각의 끝이 있을 텐데 많은 이들이 끝을 앞당겨 맞고 싶어하는 것은 ‘완벽 강박증’ 때문인지 모른다. 나의 삶과 수고한 과정의 끝은 완벽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끝’을 가정한 매듭을 미리 지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끝이 아름다운 것은 그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을 과실이 탐스러운 햇살을 받아 저절로 충분히 익어 벌어진 것을 ‘아람’이라 부르고, 떨어지기 직전의 상태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처럼. 우리의 끝 역시 좀 허물이 있더라도 오랜 시간 험준함을 겪고 맺은 결실이기에,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다울 터이다.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풍경을 ‘아람불다’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인생 아람이 불 때, 최선의 모습으로 맞이하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박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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